드디어 7시 이전에 일터 입실했다.
오늘 제출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어야 했다. 오늘은 프린트만 해서 제출할 수 있어야 한다. 초안을 만든 이후 한 차례의 점검에 멈춰 있다. 2차 점검에 이어 3차 점검까지는 해야 하는 일이다. 어서 해야 한다.
일단 계획한 시각에 도착했다. 7시 7분. 어젯밤 잠자리에 들면서 나 스스로 약속한 다짐을 실천에 옮겼다. 뿌듯하다. 내 빈약한 몸매만큼이나 내 빈약한 삶의 의지여! 부디 강건해지라. '굳세어라 금순아'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눈앞에 놓인 일 정도는 제때 제대로 해내야되지 않겠는가.
새벽 5시 30분.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섰다. 새벽 1시 30분쯤 잠들었으니 네 시간은 잤다. '통잠'이었다. 고마운 유튜브. 고마운 수면 명상. 여유 있는 출근길이겠구나 싶었다. 최상급의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제법 굵은 비가 내리고 있는 듯. 지름을 측정할 수 있는 굵기의 빗방울이라 여겨질 만큼 뒤 베란다 밖으로 들려오는 빗소리는 제법 두터웠다.
밤새 사방으로 문을 열어두고 잤나 보다. 냉수 세안에 냉수 샤워를 하고 나와보니 안방에서는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비 그쳤나?'
고개를 돌려 앞 베란다를 내다보니 송골송골 송골송골 빗방울의 가지런한 열이 보인다. 완전한 수학적 기법으로 줄을 선 빗방울들(얼마 전 이 내용을 쓴 듯. 열광을 했지. 수학 부진아가 발견한 수학 완전체의 세계를 읊었지). 구의 중심점에서 구의 표면까지의 직선거리를 잠깐 예상해 보니 2 밀리미터 정도는 되지 않을까.
저 정도야. 괜찮겠다. 어느 순간 빗소리가 제법 잠잠해졌다. 저 정도로 내리는 저 빗속은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나의 상징 흰색 운동화를 신고 달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겠다 싶었다. 운동화 안에 물기가 스며들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대신 내 머리통 가장 큰 곳 지름의 스무 배 정도는 된 우산을 들어야 하리라. 우리 집에 가장 큰 우산을 떠올려 본다. 여름철 현대판 원두막으로 세워둔 지붕 정도로 큰 우산 하나가 있다. 그 우산을 들고 날아가자.
날아라 슈퍼우먼~ 오늘 아침을 어서 신나게 날아야지. 내 알고 있는 최 단거리 출근길로 날아올라야지. 아침 풍경 찍기도 오늘은 참자. 딱 다섯 컷만 찍자. 출발하면서 두세 컷, 일터 입구에서 원거리 씬으로 두세 컷. 쓔우우우웅~. 나는 벌써 일터 입구에서 느낄, 꽉 차 있을 정신적 포만감을 미리 감지하였다. 들떠 있었다. 거리 위의 눈들이 하얀 빛깔의 내 운동화에만 집중된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내 낯빛과 내 몸뚱이에는 어느 사람의 눈빛도 멈추지 않게 하리라. 원두막 우산으로. 오직 흰빛 운동화만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경보 정도의 빠르기로 걷는다. 집에만 있어 찌든 내 육신의 운동 신경들도 맑은 기운을 되찾으리라.
새벽 5시 30분 기상의 의미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목걸이가 사라졌다. 이 세상 최고의 천사인 내 둘째 언니가 준 목걸이. '흑진주'를 연상시키는 내 새끼손가락 3분의 2 정도 크기. 검붉은 타원형 구(타원형 구라니 이 표현은 맞지 않은~)가 포인트인 목걸이는 어쩌다가, 정말로 어쩌다가 한 번씩 거는 장신구이다.
나는 좀처럼 몸에 붙이는 부산물들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왜? 귀찮거든. 내 한 몸도 귀찮은데 무슨 덧붙임이 필요하냐. 내 입, 내 두 눈, 내 두 귀, 내 두 콧구멍, 내 열 손가락. 그리고 내 무엇무엇무엇, 그리고 내 내장 이것저것들. 모두 챙겨 안고 다니는 것마저 이미 너무 무겁다. 너무 많은 살이 붙어 있고 너무 많은 근육이 얹혀 있다. 내 몸뚱이 한에서만이라도 잘 살아내고 싶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앞 '그것'은 무엇이며 뒤의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앞 그것은 '민낯의 나'이고 뒤의 '그것'은 '장식한 나'이다. 하나마나 라는 것이다. 본 판이 어느 정도여야지 뒤의 저것을 제아무리 꽂고, 꽂고 또 꽂아도 변화한 모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나 스스로 잘 아는 나이다. 천 번 만 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여 내게는 성인 여자라면 당연히 지닐 만한 지극히 기본적인 '장식의 욕구'가 없다. 불감증. ㅋㅋㅋ. 불감증이다. 어떤 화려한 장식을 내밀어도 눈 한번 까딱하지 않는다. 별것을 가져와도 내게는 별것에 불과하다.
한데 일 년 동안 십여 일 안팎으로 거의 유일하게 거는 목걸이가 사라졌다? 에이씨. 내가 움직이는 반경은 딱 정해져 있는데 대체 어디로 이동했을까. 어디로 걸어갔을까. 어디로 날아갔을까. 어디로, 어디로, 어디로.
"내 목걸이 안 보셨소? "
"무슨. 목걸이가 있나?"
"언니가 준 것이란 말이야."
"어디 있겠지."
"천천히 찾아봐.'
"천천히?"
'그럼 어떻게 해. 나는 이 집에서 목걸이 같은 것은 본 적이 없는데......."
십여 분이 지났다. 어서 가야되는데, 어서 날아가야되는데. 퇴근 시 옷을 갈아입는 공간에 쌓여있는 이옷 저옷을 뒤적였더니 '또를또를 또르르'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것이 있었으니 내 사랑하는 목걸이였다. 한번 더 뒤적여보니 지름 0. 01mm 정도의 줄까지. 다 찾았다. 내 두 눈에서, 두 콧구멍에서, 내 낡은 위아래 두 입술 사이에서 '쉐엥쉐엥 쉐에엥', 짜증스러움이 똘똘 뭉쳐진 쌍 사잇소리 덩어리가 내뿜어졌다.
'머피의 법칙'이라고. 그런 것이 있다. 내 생을 함께 놀고 있는 이 법칙은 오늘 아침에도 거침없이 내게 왔다. 미 공군 소위였다는 에드워드 머피 님을 소환하고 싶다. 어쩌자고 이 법칙을 내놓았는지. 늘 세상(?)에게 당하고만 산 듯싶은 사람들은 일을 시작하면 일단 이 법칙이 떠오를 것이다. 이어 뇌를 지배하고 있는 사고는 사람의 일을 또 그쪽으로 몰고 간다. 서민들이 서 있는 곳은 또 그렇고 그런 곳이기 마련이다. 결국 서민들이 서 있는 곳은 머피의 법칙이 지배하는 공간이 대부분이다. 결국 머피의 법칙 안에 서민들은 서 있게 마련이다. 우리. 안쓰러운 서민들.
사실 실제 에드워드 머피가 겪은 일과는 차이가 크다. 머피 아저씨의 일에는 머피 단독 시스템으로 진행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부하들이 일을 저지른 데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소환된 머피 아저씨를 그러실 게다.
"어이, 이 사람아. 나 바빠요. 이 세상 사람들, 현재 이 시각, 내가 내놓은 법칙으로 세상사를 고전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보아하니 당신 일은 오로지 당신이 저지른 일이지 내 법칙이 적용될 이유를 전혀 갖추고 있지 않소이다. 나, 바쁜 몸 이외다. 나, 유명 인사요. 전 세대를, 전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사가 진행된다면 영원히 존재할 '나'요. 함부로 나를 소환하지 말기요. 당신, 어제 본 영화 '루이스~ 고양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내용의 영화에서도 들먹여지지 않소? 사라진, 혹은 잊힌, 혹은 죽은 존재들도 현재 불러내면 현재에서 부활하여 존재하고 미래 시점에서 불러내면 미래의 시점 속에 부활한다는 것. 내가 바로 그렇소. 나는 가요. 반성하시오."
아하. 떠억. 한 방 또 야무지게 맞았다. 정통으로. 그래, 눈을 감고 나를 돌아본다. 가만, 찬찬히 내 생을 들여다보자. 내 생에 작용했다고 생각했던 모든 일은 '내 탓'이었지 '남의 탓'이 아니었다.
'내 탓이로소이다. 내 탓이로소이다. 내 죄를 사하여 주시오. 내 탓을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탓으로 옮긴 채 떵떵거려온 내 지나온 생을 살피겠나이다. 모두 다 내 탓이었소이다.'
사설이 길어졌다. 아침 일기를 시작하면서 쓰고자 했던 주제는 결코 머피의 법칙이 아니었는데 떡 하니 a4 한 장 정도를 뒤덮고 말았다. 돌아가자. 내가 오늘 아침 쓰고자 했던 주제가 무엇이었던가. 아. 7시 31분. 내심 7시 30분까지는 이곳에 있자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현재 시각 7시 32분. 여기서 멈추고. 오후에 다시 오기로. 잠시 잠깐 안녕. 머피 아저씨. 안녕히. 내 소심함과 경망스러움을 용서하시오. 잘 가시오. 다시 만날 것은 기약하지 않겠소. 소위 제대로 된 '안녕'을 고하면서. 안녕.
여기서부터는 퇴근하여 구운 닭 한쪽 살을 찢어 먹는 것으로 저녁을 처리한 후 며칠을 가볍게 소화시키고 나서 시작한 것이다. 꿰매고 짜깁기하고 해진 곳이 너무 많았다. 바쁘게 쓴 것이 어설픔의 이유겠지.
열심히 열심히 살아냈다, 오늘. 한 조각의 시간도 날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열심히 쓰다듬고 공을 들였다. 조각조각 시각 조각들을 순간 본드로 열심히 붙였다. 조각조각 붙이고붙이고 또 붙여서 일 분, 십 분, 한 시간으로 만들었다. '시간' 단위까지 만들어냈다. 1분 1초도 헛되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2차 점검에서 멈췄다. 단 한 번만 철저하게 점검하기로 하고.
그리하여 뒤돌아보지 않으니 보이지 않더라니. 다시 안 보니 보이지 않더라니. 벽을 세우고서 나 몰라라 하자 하니 알고 싶은 마음부터 사라지더라니. 완결했다 생각하니 뭐, 완성품이더라니. 완성품이라 하니 완성되어 있더라니. 하루 물려 내일 아침에 제출하고자 한다. 아마 내 성격상 3차 점검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또 이렇다.
'에구머니나. 제출하면 제대로 된 점검이 있을 텐데. 오탈자나 문맥상의 혼미함이 발견되면 그 부끄러움을 또 어떻게 견디지?'
그렇다면 오늘 밤 한번 더 다짐하고 잘까. 내일 하루만 더 7시 이전에 일터에 도착하자. 그래서 오늘처럼 해내자. 그래, 꾹 참고 3차 점검은 하자. 어쨌든 일단 오늘 해야 할 일은 해냈다고 생각하자 나를 붙들어 안고 춤추는 속담 한 문장이 있으니.
나. '물 본 기러기 꽃 본 나비' 되었네.
오늘 아침은 결국 겨울 워커를 신고 달려야 했다네. 현관문을 나서려 하자 내 귀를 때리는 빗방울의 지름은 자를 들이대고 재기에 충분할 만큼 길어졌다네. 딱 내 출근 시간에만 비가 왕창 쏟아졌다네. 휑한 목덜미에서 흑진주 빛 목걸이만 제 숭고한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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