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go away - 잃어버린 나의 서정을 찾아 나서고 싶다.
이름만 들어도 깜빡 죽는 내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가 출연한다는 안내를 읽고 영화 '레이디스 앤 젠틀맨'을 시청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그의 출연작은 모두 봤다 싶었는데 포스터며 제목이 낯설었다. 실내 운동을 해야 하므로 일단 내친김에 시청하였다. 끝까지 다 본 것은 아닌데 중간 정도에서 나를 붙잡는 대목이 나와 멈췄다. 사실 영화는 제레미 아이언스에 대한 기대에는 못 미쳤다. 그렇고 그런, 내 높은(?) 수준과는 맞지 않은 자잘한 사랑 이야기인가 싶어 그만 멈추려던 찰나였다. 젊은 치매(?) 비슷한 증상이 시작된 어느 가수가 병원 진료를 예약한 후 바에서 노래 부른다. 그녀는 이전 홀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한 남자를 사랑했다. 그 홀에서는 주로 색소폰 연주자를 가운데 두고 그의 연주에 맞춰 흑인과 백인 두 여자가 양쪽에서 노래를 부르는 방식으로 공연을 한다. 그녀는 색소폰 연주자를 사랑했으나 그는 흑인 여가수를 사랑한다. 그 와중에 그녀의 치매 증상이 시작된다. 이 여름날 당신이 가버린다면태양을 앗아가는 것과 같아요여름 하늘을 날던 새들도 데리고 가버리는 것이지요우리 사랑으로 가슴 뛰던 때밤 길던 때, 새의 노래에 귀 기울이던 때당신이 가버린다면
그리고 당신이 가지 않고 내 곁에 남아준다면 멋진 세상을 만들어드리리다라는 내용이 이어지는 팝송이다. 원곡은 샹송이다. 워낙 많은 가수의 리메이크가 있어 대체 어느 때 노래인가 싶을 정도다. 찾아보니 1959년 곡이여 쟈크 브렐 곡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 진료일을 하루 앞두고 바에서 노래 부른다.
바 안에는 여러 남녀가 한 쌍씩 엮어져서 가볍게 춤을 추고 있다. 요란하지 않으면서 넉넉함을 베푸는 조명이다. 그녀는 창턱에 앉아 있다. 양쪽 다리는 조심스럽게 늘어뜨렸다. 마이크를 입 가까이 들어 올리고 있다.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If you go away~, on this summer day~. 첫 소절을 부른다. 두 번째 소절을 노래한다. 세 번째 소절로 넘어가기 전에 멈췄다.
목욕재계하고 정갈해진 영육으로 남은 부분을 듣기로 했다. 급하게 씻고 나왔다. 이곳에 글을 올리고 난 뒤, 오늘 하루의 모든 것을 한 점에 모은 뒤에 마저 듣기로 하였다. 이 영화를 못 봤더라면 오늘 일기 내용이 이것이 아니었으리라. 무슨 내용이었을까.
어젯밤에 본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에 관한 내용이었을까. 어제오늘에 걸쳐서 그린 '브래들리 쿠퍼'에 관한 것이었을까. 쓰고자 하는 내용을 여럿 기록해 둔 '내 어머니의 언어'였을까. 내 어머니께 죄송하다. 그러나 결코 오늘 일기 내용으로 써졌을 또 다른 내용이 아깝지 않다.
그녀의 'If you go away~', 'on this summer day~'가 내 이마 한가운데를 시작으로 정수리까지 이어진 날카로운 선을 그으면서 아리따웠던 내 청춘의 고운 혹은 열정적인 감정들을 소환하였다. 검붉은 흑장미 한 송이를 들고 모차르트 레퀴엠을 들으면서 눈물 쏟던 날이 떠올랐다. 장대비 내리쏟던 여름을 쇼팽의 녹턴을 최고 음으로 연주하게 하면서 내달리던 드라이브 길이 내 심장을 달렸다.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들으면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콧물을 주섬주섬 주워 담던 연무 짙던 길의 아스팔트 거죽이 내 두 눈을 뒤덮었다. 어느 섬으로 가던 길, 프레디 머큐리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연속으로 들으면서 내 젊음을 미친 듯이 질주하던, 이미 불러온 태양으로 벌써 환해진 한여름의 미운 새벽이 떠올랐다.
가만 최근 몇 년의 나를 뒤돌아본다. 아무것도 없다. 아리따움은 한번 가면 되돌릴 수 없는 인생사이니 그렇다 치자. 우연히 지나치게 되는 화원에서 나는 흑장미를 살 생각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내 그토록 사랑하는 흑장미의 검붉은 채 차가운 지성을 버린 것이 꽤 됐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라니 한 시간여 다 되는 그 음악 전곡을 차분히 들을 시간을 나는 마련할 수 없다. 녹턴으로 쇼팽의 생을 논하던 때가 오래전이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어쩌다가 우연히 돌린 음악 프로그램에서 들을 수 있을 때도 무던한 감정으로 그저 보는 데에 그친다. '보헤미안 랩소디'며 프레디 머큐리와 같이 산 생활도 까마득하다. 나는 마치 젊은이의 등 뒤에서 늙은이를 노려보는 죽음을 사는 것처럼 모든 정서 표출을 멈춰버렸다.
그녀, 영화 <레이디스 앤 젠틀맨>에 제레미 아이언스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아니 '여름' 관련한 영화가 아니었다면( '기쿠지로의 여름'이 끝나면서 알고리즘이 데려온 영화였으므로) 프랑스의 실존 가수 '패트리시아 카스'가 부르는, <If you go away>의 두 소절을 들으면서 잃어버린, 아니 나 스스로 폐기함에 넣어둔 내 소중한 '서정'을 되찾고 싶어졌다.
오늘 밤 나는 일부러 '불면의 밤'을 고집할지도 모르겠다. 중간에 멈춘 영화 <레이디스 앤 젠틀맨>을 마저 보고 양희은을 듣겠다. 프레디 머큐리를 듣고 쇼팽을 듣고 모차르트를 다 들어야만 잠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 아침에는 해마다 찾아드는 비둘기 부부의 침입을 막고자 세워둔 에어컨 실외기 설치처의 흑장미 화분에서 늦여름을 고상하게 견디고 있는 꽃 한 송이를 곱게 잘라 식탁 위에 꽂아야 되겠다. 열심히 꽃 피워도 물을 줄 때 말고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주인이 얼마나 미웠을고. 열심히 물 갈아주면서 오래도록 빛을 발하게 하리라. 내 사랑스러운 서정을 되찾아 아름다운 서사의 나날을 지내리라. (되도록~우, 슬퍼라.)
알고리즘에 또 한번 감탄한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패트리시아 카스(영화 '레이디스 앤 젠틀맨'에 실제 여주인공으로 출연하고 노래를 부름. 리메이크 중 그녀의 노래가 가장 인기가 있다고 함. 방금 찾아보니. 아마 이 영화 속 노래로 그렇게 된 것인지는 더 찾아봐야 알겠음.)의 <If you go away>를 듣기 시작하였다. 유튜브는 곧이어 쉬나 이스턴(영국 가수)의 <If you go away>을 들여주더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지금 들려주고 있다. 나는 단지 패트리시아 카스의 <If you go away>만 켰을 뿐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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