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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가을가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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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가을하다. 

- 아직 우리말 사전에는 입력되지 않은 상태의 낱말이다. 가을 느낌이 짙다, 가을이 무르익었다는 뜻을 담은 낱말로 사용되고 있다. 대중들의 언어 습관을 살펴보면 머지않아 우리말 사전에 안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어제오늘 피부에 와 닿는 기운에서 가을 냄새를 충분히 느꼈음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 낱말을 제목으로 사용한다. 

 

 

귀뚜라미   무료 사이트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가만, 가만히, 조용히 좀 해 봐. 조용, 조용히 좀 있어 봐.”

혼자 있으면, 밤이면, 불면을 다독이는 밤의 한가운데에 내 두 눈동자가 직립해 있을 때면 여지없이 자기 존재를 확실히 드러내는 내 달팽이관 속 ‘이명’에게 어젯밤엔 거칠게 명령을 내렸다.

“조용히 좀 해 봐. 너 말고 다른 소리가 들린단 말이야.”

“쓰으 쓰으 쓰으, 찌르, 찌찌르, 찌찌르르~~, 안 들려? 들리잖아.”

“아, 가을 풀벌레 소리 아냐? 맞지? 여치 아냐? 귀뚜리 아냐? 베짱이 아냐?”

아직 여름이 쨍쨍한데 무슨 가을벌레냐고 이명이 기세 등등하다. 어젯밤도 밤새 녀석과 실랑이를 벌였다. ‘이명’은 꼭 혼자 지새우는 밤에 나를 독차지하고자 몸부림을 친다. 낮 동안에는 힘을 못 쓰니 얼마나 다행이냐. ‘코로나19’가 준 선물.

 

 

확실하다. 분명 확실하다. 가을벌레 소리이다. 사실 며칠 전부터 들리던 소리이다. ‘가을인 갑다. 참 내, 세월 너 그러기냐? 왜 그리 빠른 것이여? 뭣 땜시? 너는 왜 소리 소문 없이 안녕인 것이여?’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불행히도 ‘한글 맞춤법’을 ‘서울’ 기준의 ‘표준어’만 인정하고 있어 이렇게 바꾼다. ‘가을인가 보다. 참 내, 세월 너 그러기냐? 왜 그리 빨리 가는 거요? 뭣 때문에? 너는 왜, 늘 소리소문없이 안녕이야?’ 재미가 없다. 이것도 획일화다. 상업성이고 권력에 의한 구획화이고 자본의 음흉한 놀이이다. 올해 들어서 처음 쓰고자 하는 ‘가을’이기에 어찌 좀 ‘구수하게’ 풀어볼까 했는데 블로그에 글을 올릴 때마다 ‘통제’에 바쁜 ‘맞춤법’이 생각이 나서 미리 수정한다. 진짜로 아쉽다. 사투리도 좀 살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맞춤법에 사투리 허용하기, 좋은 것 아닌가? 일종의 고유어 지키기도 되고 잃어버린 우리 선영들의 인정도 되살릴 수 있다. 또 헛소리다. 여기서 각설하고.

 

 

어젯밤 진짜로 가을을 들었다. 낮은 여전히 후덥지근하고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찐득거림이 활개를 치는데 어두움이 지상에 내리자 새로운 소리가 들린다. 가을벌레들이다. 무심코 들리는 소리. 여름 녀석, 제 자리 지키는 데에 힘이 부실하구나 싶으니 내 양쪽 엄지발가락 길게 몸 늘려 저 아래 밀쳐둔 이불 한 장을 끄집어 와 복부 위에 얹는다. 몰래 온 가을바람은 ‘정복’의 기쁨에 자기 힘을 지나치게 펼칠 수가 있다. 찬 바람만 불면 운신하기 버거운 내 육신은 이 시기에 자칫 몸살을 앓는 수가 있다. 여전히 ‘코로나19’이다. 절대로 아프면 아니 된다.

 

 

유튜브를 껐다. 지금 이 시각에는 미리 온 가을만 듣고 싶다. ‘미리 온 가을’. 관련 속담이 생각나고 여기에 덧붙여서 주식 생각이 떠오른다. ‘7월, 미리 온 귀뚜라미.’ ‘풋’, 웃음 한 조각을 내뱉는다. 최근 몇 개월을 주식 방송만 틀면 내놓은 주식 애널리스트들의 문장. ‘현재 주식가는 미리 온 것입니다. 앞으로 올 상황을 모두 반영하여 하락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 됩니다. 매수 시기입니다. 늘 말씀드렸지요? 현금을 확보하라고요. 지금 사세요.’ 그러나 주식은 끝없이 추락하였고 여전히 추락하고 있다. 사람은 여전히 ‘매도’와 ‘매수’ 두 낱말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있다. 귀뚜라미들, 오늘 밤은 ‘서러움’의 버전으로 울겠구나. 나, 대자연의 일원으로 미리 온 것을, 너희 인간계 소란 떠는 방정맞음에 비유하기는~. 미안, 귀뚜리들.

 

 

‘말복’이 지났구나, 아하, 내일모레, 8월 23일은 처서이구나. 처서, ‘나락 크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 농부 아저씨들의 논에서는 ‘나락’들이 잘 자라고 있을까. ‘나락’을 읊고 보니 궁금하다. 요즘 어린이들은 ‘나락’이라는 낱말을 알까? 카톡에 올려봐야지. 유독 가을 관련 낱말들에 고운 언어가 많은 듯싶다. 고유어도 많고 형형색색의 형용사도 많고 문장을 풍성하게 장식해주는 부사들도 많다 ‘가을 하다’, ‘도토리’, ‘건들장마’, ‘가을비 떡 비’, ‘늦가을 서리 가을’, ‘억새풀’, ‘밤‘, ‘이슬’, ’‘여물다.’ ‘서늘하다.’, ‘선선하다.’ ‘지다.’, ‘떫다.’ 등등.

 

 

오늘 밤에는 가을 소리를 더 차분하게 들으면서 누가 와 있는지 분간해볼까 싶다. 부드러운 소리로 암컷에게 구애하는 구뚜라미인지, 쌕쌕쌕 긴고리 쌕쌔기인지, 베 짜러 온 배짱이인지, 여치의 ‘치, 치, 치’인지. 방울벌레 ‘리잉, 링, 리잉, 링링’인지.

 

 

'가을 아욱국은 누구 내쫓고 먹는다'고 했다. 내일 퇴근길에는 마트에 들러 혹 아욱 있으면 사와 아욱국을 끓여 먹어야 되겠다. 아욱국을 먹고 나면 배 속이 이내 차분하게 숨 쉰다. 참 고마운 아욱이다.

 

 

‘가을’, 가만 소리 내어보니 안타까이 사시다가 간 시인 박정만의 시 ‘가을 속으로’가 생각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눈부신 꽃잎만 던져놓고 돌아서는 들끓는 마음속 벙어리 같이. 나는 오늘도 담 너머 먼 발치로 꽃을 던지며 가랑잎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내사 짓밟히고 묻히기로 어차피 작정하고 떠나온 사람~~~

 

 


 

종일 '하비에르 보텟'을 그렸다. 거짓말 쪼끔 보태서 천 번은 그를 들여다봤다. 어렵다. 오늘 완성하고 새 그림을 시작하리라는 어제의 다짐은 스러졌다. 내 영육도 스러질 듯하다. 휴가 끝. 모레가 아닌 내일부터 출근이다. 에고에고에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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