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뒤로 물러섰다.
어젯밤 긴 불면의 밤에 내 생각을 지배했던 부분이 오늘 이곳에 올릴 글의 내용이었다.
'새날이 되면 어서 일어나 새벽 출근을 해야지. 쓰디쓴 원두커피 한 모금을 마시면서 내 일터의 적막을 숨 쉬어야지. 내가 좋아하는 그곳 고유의 냄새가 내게 던져주는 음울한 소리 모음 음악 삼아 글을 써야지. 일기다운 일기를 써야지.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말이다. 일기다운 일기를 쓰자.'
언젠가부터 시작된, 비정상적인 불면의 날을 경험한 다음날의 징후가 오늘도 느껴졌다. 지난밤 난삽한 수면을 전혀 생각나지 않게 하는 정도의 정상적인 낮. 영화 '이퀄라이저'를 켜고 만 덕분에 잠은 날아가 버렸고 두세 시간을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영화, 다시 영화를 끄고 잠에 들기를 시도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시간을 홀라당 저 혼자서 훨훨. 새벽녘 한두 시간을 잠든 듯했다가 깨어났지만 낮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극히 정상이었다. 눈만 쏙 들어가서 큰 눈이 황당할 만큼 더 커졌을 뿐이었다.
어젯밤 생각으로는 오늘 일기를 '가을맞이'로 쓰려 했다. 입추, 처서 다 지나고 이슬, ‘흰 이슬’, 밤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히는 데서 유래한 절기, '백로'가 며칠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때는 바야흐로 '가을'에 진입했구나 싶었다. 여름 홑이불이 새벽녘이면 한기 비슷한 기운을 느끼게 했다는 거다. 요 며칠.
지금 그런 생각이 확 달아났다. 아직 오늘 해야 할 실내 운동도 하지 않았는데 몸이 뜨겁다. 마치 한여름 열대야처럼 느껴진다. 일터에서는 냉방으로 인해 더위를 못 느꼈나 보다. 퇴근길에는 바람이 조금 있어 그럭저럭 길을 걸을 만했다.
시립도서관에 대여했던 책을 반납하러 퇴근 이후 다녀왔는데 그때도 그다지 더위를 느끼지 못했다. 집에 들어왔더니 급하게 때맞춰서 더위가 집 안을 점령한 듯싶다. 베란다 밖에서는 가을벌레들의 소리인 듯싶은 것이 나의 이명 증세를 자극하는데 실내에 있는 나의 몸은 엄청나게 뜨겁다. 습한 기운도 꽤 되어 후덥지근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여름에 만났던 이런 더위는 오늘처럼 어렵지 않았다. 여름은 여름날이니 했던 거다. '난공불락(어울리나?)'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각날 만큼 현재 내 몸이 감지하는 더위와 습도와 열기가 징그럽다. 아마 실내 운동 세트를 온전히 소화하기 위해 아직 씻지 않은 것이 큰 이유이리라. 그렇다 치더라도 어젯밤에 느꼈던 제법 선선한 기운은 오늘밤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힘을 다 내놓지 않은 늦여름이 우주 한 귀퉁이에 숨어있다가 오늘 오려는 가을을 급습했나 보다. 가을, 초가을은 여지없이 무너지고서 뒤로 물러서고 아직 여름 기운이 짱짱하다.
짱짱하다. 우리 엄마가 생각나는 낱말이다. 늘 알뜰한 살림을 추구했던 장손의 아내. 사시사철 상관없이 늘 짱짱한 하루를 보내느라 정신없었던 내 어머니의 삶.
오늘 내 생은 얼마나 짱짱했나. 이곳에 적나라하게 밝힐 수 없어 안타깝다. 사실 지난주부터 항명해야 할 내용이 있어 복잡했다. 여럿이 무리 지어 갑질을 일삼는 자들에게 저항의 표를 해야 했다. 지난 일주일 내내 금요일 밤과 토요일 아침만 기다렸다. 평일에는 온전한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생각의 꼬리를 물고 살아야 했던 일터 문제였다. '빚쟁이 발을 뻗고 잠 못 잔다'더니 나는 마치 세상에, 동료들에게 거대한 빚이라는 진 양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지쳤고 나는 이 소란스러운(?) 일터에서, 이런데도(?) 이 긴 기간 살아낸 내가 징그러웠고 '항명'을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데 이편저편에 나를 맞추고 싶지 않아 독단적인 행위를 지탱해야 해서 괴로웠다.
'어서 금요일 밤만 와라. 머리도 감지 않고서 푹 자야지. 토요일 아침은 만사 팽개치고 누구 내 몸뚱이 보쌈해 가도 눈뜨지 않을 만큼 깊은 잠을 두고두고 자자.'
고 맹세했다.
잤다. 금요일 밤이야 이 일 저 일 하느라고 또 늦었지만 토요일 아침은 무려 열 시까지 잤다. 배움에 배가 고파 시종일관 유튜브 강의까지 끝도 없이 공부하는 품새로 사는 내가 그제 토요일 늦잠 후에는 어떤 후회도 하지 않았다. 잠이 고마웠다. 지저분한 일을 잊을 수 있는 잠의 세계가 고마웠다.
오늘, '항명'의 방법을 내 방식대로 치렀다. 나는 어차피 그렇게 살아온 생. 부딪히니 마음 편했다. 내 뜻대로 했다. 누구 간섭하지 않았다.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사람이 없음을 잘 안다. 늘 내 뜻대로 살아왔으니까.
아직 제대로 당도하지 못한 가을 타령을 하려다가 그만 일기는 또 쓸데없는 일터 이야기로 흐르고 말았다. 자, 어서 어젯밤 보다가 멈춘 영화 '이퀄라이저'를 보면서(나를 달래야 했다. 이런 류의 영화로!) 실내운동을 하고 냉수로 전신 씻기를 한 후 잠의 세계로 진입하자. 모두 잘 자길. 안녕. 세상이여, 밤 시간은 잠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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