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하다.
늦은 일기이다. 아침은 저 멀리 가 있다. 어제 들은 강의 '몰입'은 내일 월요일도 쉰다는 생각에 강력하게 몰입한 것이 확실하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고 3 시절 친구들의 잠든 얼굴을 그려주던 내게 '쯧쯧'을 대신하여 말씀하시던 담임 선생님이 갑자기 떠오른다. 아침 기상 알람 시각인 여섯 시에 정식으로 눈을 떴다. 내일도 쉰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눈 뜨자마자 하는 생각은 그에 몰입했다는 것이랬다. 맘 편하게 휴대폰을 운행시켰다. 무엇을 했던가. 최근 여러 날을, 내가 했던 행동에 대해 반성 비슷한 것을 했으므로 아마 허튼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준영 박사님의 강의를 들었을 것이다. 혹은 홍사훈의 경제쇼를 들었을까. 홍사훈 님의 목소리는 그 여운이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아니다.
현 영국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영국도 참. 올 상반기 계속 주식을 사라고 열띤 강의를 하던, 말만 좋은 어느 애널의 강의도 잠깐 들었나? 아니다. 현금 있으면 뭐 사라는 식의 강의길래 넘겼다. 비지 가득 반짝반짝 빛나는 애널의 얼굴에 진저리가 쳐졌다. 나는 사실 그의 강의가 얼마나 실속이 없는가를 진즉 느꼈다. 진즉 징그러웠다.
달달한 맛에서 영 벗어나지 못해 문제인 내 식탐이 걱정되던 차 숏 영상에 있던 고지혈증 블라 블라 하는 영상도 봤다. 피해야 할 음식에 관한 것이었다. 내 관심사인 과일이나 꿀, 견과류도 들먹였다. 적당히 먹으라는 것이다. 제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지나치면 병이라는 것이다. 나는 상당한 양을 먹는다. 주의해야 되겠다. 그리고는 인도의 반도체 산업 관련 강의를 최준영 박사님으로부터 들었다. 두 번 들었다. 유튜브 강의 영상이 그렇다. 한 번 듣는 것으로는 머리에 제대로 입력되지 않는다. 그것이 문제이다.
오후에 어려운 손님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기왕지사 시작한 일, 베란다 정원 정리를 이참에 끝내자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 의뢰 없이 나 혼자의 힘으로 하기로 했다. 왜? 외부 힘을 빌려 멋들어진 신삥으로 하려니 했는데 내 계획을 들은 가까운 사람 왈, 맞대응해오는 답이 걸작이었다.
" 그냥 이대로 살지, 뭐 얼마나 산다고 그것을 돈 주고 사서 해? 특별히 구조 변경을 하는 것도 아닌데. 실내 구조까지 완전 리모델링이면 모를까 베란다 조금 정리해봤자 그것이 그것이겠다."
옳은 말이었다. 얼마나 산다고. 오, 세상에나. 얼마나 산다고. 그러나 수긍하기로 했다. 뭐 황금 박치기를 할 것도 아니고 쪼그랑 살림에 내가 해야지. 원하는 화분에 화초들을 기를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 하자. 내 손 내 정원을 가꾸자. 오늘 내 집에 와서 갈치조림을 먹고 갈 '줌마 여행단'에게 정돈된 정원을 보여주자. 마음먹으니 거침없이 내 손은 움직여졌다. 어제까지 사나흘 미리 해둔 덕분에 나 혼자서 충분히 정리 정돈이 가능했다.
또 한 사람이 열심히 흙이며 나무들을 버려주는 일에 동참했다. 그는 점심과 저녁도 열심히 꾸렸다. 1차 정리가 점심 전에 끝났다. 화분에 물 주기까지 해냈다. 더군다나 오늘은 다육이들까지 모두 물을 먹이는 날인데 삼프로 tv의 '남아시아 몰아 듣기(서울대학교 강성용 교수님 강의)'와 함께 하니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게는 역사와 세계사 등 스토리 텔링이 가미된 공부가 잘 맞는다. 강의는 두 번째 듣는 것이다. 유튜브 만으로도 충분히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오늘 새삼 또 하게 되었다. 강성용 교수님은 참 쉽게 강의를 하신다. 유익한 유튜브이다. 다만 내 블로그에 진입하는 구글의 검색 수가 적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 크
아침을 굶고 막노동 끝에 먹는 점심의 맛은 기가 막혔다. 사실 오전 중 텅 빈 배의 상태가 정말 좋았다. 날아갈 듯 가벼워진 몸이 느끼는 맑은 정신은 고결한 생의 최초 순간에 서 있는 느낌이다. 그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나 빈혈이며 탈모며, 정신적인 병증으로까지 진화된다는 등 여러 설이 무서워 굶기에서 얼른 손 뗀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입술이며 이며, 혀며 그것들을 구성하는 미각 세포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점심 식사를 맛나게 했다.
'다 차렸으니 어서 와 드시오'라는 문장을 듣고 식탁 앞에 앉는다. 전무 상태인 듯싶은 내장의 공백이 느끼는 황홀함을 이미 버렸다. 비움의 미를 그만 잊고 만다. 먹고 또 먹는다. 음식이 음식을 부르고 맛이 음식을 부른다. 이때 내게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문장이 있다. 얼마 전 들었다. 평소 비문 한번 내놓지 않은, 정신이 꽉 찬 동료로부터 들었다. '음식 섭취 시간인 여덟 시간은 어떤 것을 먹어도 괜찮다던데요'라고 읊어주던 내 믿음직한 동료의 안내문이었다. 그가 말했으면 정답이다. 열심히 먹었다. 새우부추전을 몇 장 먹었던가.
사실, 오늘은 어찌 좀 참아볼까도 싶었다. 어젯밤 실내 운동을 했지만 크게 낮아지지는 않았으리라는 몸무게가 무서워진 것이 사실이다. 오늘 아침에는 아예 저울과의 만남도 실시하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정말 배가 짜구나게 생겼다는 사실만 가득 입 안에 담겼다. 역류성 식도염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먹은 저녁이 또 만찬이었다.
인간이라면, 성인일진대 말이다. 설령, 어쩔 수 없이 저녁을 먹게 될지언정 양을 조절해야 되지 않을까. 변명을 좀 하자. 영화가 문제였다. 한때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우상 중 한 명이었던 우디 앨런의 영화를 시청하던 중이었다. 그의 코미디스러운 영화와는 영 딴판의 영화 한 편을 봤다. <또 다른 여인>을 보던 중이었다. '두 발을 가슴팍까지 올려 걷기 100'을 시행하면서 열심히 보던 중이었다. 자기 남자가 자기 친구와 놀아나는 현장을 목격한 여인이 자기 남자가 결혼기념일이라며 주는 선물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말한다. 헤어져요. 그런 류의 화두를 던지고서 그녀는 와인을 마신다. 와인이었던가. 어쨌든 주류를 마신다. (영화는 사실 상당히 심오하다)
마침 지난주 일요일 손님과 마시다가 멈춘 막걸리가 생각났다. 막걸리는 새 병을 한 입 정도 마시고 남은 채 냉장고에 들어 있었다. 또 한 사람이 이를 그만 지나쳤다니 감탄할 만할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유통기한을 보니 어제까지이다. 또 한 사람에게 협조를 구했다. 유통기한이 어제인데 마셔도 되냐고 물었다. 또 한 사람이 아주 쉽게 답을 보내왔다. '괜찮아. 막걸리는 발효식품이잖아.' '좋아 오늘 밤은 좀 축 쳐진 채 지내보자. 마시자, 마셔라. 한 잔의 추억!'
한 살림하는 또 한 사람이 골프장으로 가면서 말했더랬지. 민어, 내일까지 모두 먹어야 해. 철저하게 서민 코스프레로 살아내는 운명인 관계로 나는, 우리는 집에 있는 음식물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밥이 없으므로 막걸리로 곡기를 채운다. 밥심 대신 막걸리심으로 오늘 밤을 살자. 민어 살덩이와 무 몇 조각이 있는 국물을 섭취하면서 막걸리를 병째 마셨다. 나이 들수록 나와 맞는 술은 막걸리이다. 늙어간다는 것일까.
개운하다. 목욕재계까지 하고 나니 온 세상이 천진난만하다. 막걸리가 조정하는 인간의 기분이 제법 그럴싸하다. 인간. 술 아래로구나, 인간. 크 외치면서 주신에게 재롱을 좀 떨어본다. 주신 왈 '거 참 살다 살다 별 ~' 주신은 취하지 않았나 보다. 몸이 가볍다. 기분이 상쾌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산뜻하다. 오늘 이후 나의 생이 만사형통할 듯싶다. 우리 엄마. 그 많은 일들 끝낸 저녁이면 하시던 말씀이다. 개운하다 혹은 개안하다. 진즉 좀 화분 늘리는 것을 멈출 것을. 진즉 좀 삽목 같은 것들 좀 그만둘 것을. 진즉 좀 치울 것을. 진즉 좀 없앨 것을. 그 많던 화분들을 정리한 내가 참 든든하다. 괜찮은 사람이다.
이제 진정 '생의 정리 단계'로 발을 내딛는다. 너무 거창한가? 미니멀리즘을 살자. 오, 제발 그 어떤 것도 집에 들이지 말자. 제발! 이젠 책을 정리할까? 아니 옷을 먼저 버릴까? 시 '우리가 물이 되어'로 내 사춘기를 꽉 붙잡으신 강은교 시인이 떠오른다. 당시 많이 아프시다고 했다. 몸도 마음도 편찮으시다고 했다. 젊은 시절부터. 그분의 산문을 읽은 기억도 떠오른다. 간단하게 산다고. 가방 속에도 정리 정돈을 꼭 해서 다닌다고. 언제 어디서 쓰러질지 모르는 생을 살기에 최소한의 삶을 산다고 하셨던 듯. 그리고 꼭 챙기는 셋을 말씀하셨다. 그 내용은 다음에. 아니 진즉 블로그 글로 썼던가. 막걸리도 술이구나. 정말로 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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