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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여름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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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여, 안녕!

 

 

여름이여, 안녕

 

 

어젯밤 자정 무렵이었다. 아니 새로운 날이었던가. 사진이 필요해 베란다로 나갔다. 보름일까 벌써. 꽉 찬 달이 하늘에 둥실 두둥실 떠 있었다. 바깥으로 난 유리창을 연 순간 내게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의 힘을 깨닫게 한 것은 달이 아니었다. 달은 바람 다음이었다. 잠깐 자연과 소통하겠다는 내게 먼저 온 것은 사납고 드센 바람이었다. 전신을 휘어잡아 삼킬 듯, 바람은 배배 꼬아놓은 똬리를 풀어헤치면서 내게 덤볐다. 바람 똬리의 회전 수를 계산할 수 없었다. 문을 여는 것조차 힘들었다. '삐끗' 정도에서 문 열기를 멈췄다. 밤하늘을 향해 핸드폰을 든 손만 바깥바람 속에 투신하게 하였다. 필름에 사각 입체 한쪽이 보였다. '빼꼼' 눈을 더 열고 몇 센티미터 더 창을 움직였다. 달을 촬영하려던 참이었다. 달은 너무 멀리 있었다. 신축 아파트가 거만하게 나의 달을 자꾸 더 먼 하늘로 던졌다. 그렇지 않아도 방아 찧느라 바쁜 토끼 한 쌍의 무례함을 달래느라 바쁜 달을 내게서 더 멀리 떼어놓았다. 사람이, 사람 손이 만든 것이 사람에게 큰 문제였다.

 

3박 4일을 집에만 있었다. 어젯밤 바람은 지난주 금요일과 주말, 아니 어제 낮 동안 햇볕과 함께 왔던 녀석이 아니었다. 대뜸 물불 가리지 않고 사람에게 덤볐다. 가닥을 칠 수 없는 동세에서 무지막지하게 화가 나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체 정화작용을 거치지 않은 채 날 선 침을 입에 물고 바람은 내게 달려들었다. 바람의 혈액들이 내 가녀린 몸체에 내리꽂혔다. 대동맥을 콸콸 흐르던 것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쉼 없이 왕성한 혈기로 사람을 난타했다. 내뿜었다. 우선 무서웠다. 타인의 공간이 잡히지 않은 선에서 달을 촬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제대로 경험했다. 재빨리 열린 문을 닫았다.

 

 

가을로 떠나는 구름

 

 

'휴~' 가는 안심을 굵은 한숨 속에 담았다. 밤은 바람 빼고는 모두 고요였다. 바람의 하소연이 들렸다. '나를 들여보내 줘요.' '내 혈액이라도 맞아 줘요.' '사람들은 왜 자기네들이 필요할 때만 나를 부를까요. 사람들은 왜 속 깊은 바람을 추려낼 줄 모를까요. 오늘 당신에게 가는 내가 진짜 바람이라오. 한여름 당신의 땀을 혀로 핥듯 핥아내던 몸매 좋은 바람이 전부가 아니라오. 여름을 갈무리하는 바람, 지구, 대기의 순환을 매끄럽게 해낼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오늘 당신에게 온 것이라오. 지금이라오. 어서 문을 열어요. 조금만 더 나를 받아들여 봐요. 사나움이란, 거침이란 그 기준이 얼마나 오묘한지 모르겠군요. 오늘 당신에게 가는 내 차림새가 십이월 동지섣달 한가운데였다면 어땠겠소. 하, 한겨울 바람이 이 정도라면 어찌 봄동에 아삭아삭, 혓바닥 얼얼할 만큼 절절한 맛이 스미겠소. 겨울은 겨울다워야지. 당신들은 또 한탄했겠지요. 이랬다가이랬다가 저랬다가 제멋대로인 인간들이여 내게 한심한 가락이라도 좋으니 여유를 좀 빌려주시오.  

 

더 넓은 생각의 창고로 당신을 데려가겠소. 당신이 쓰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안내할게요. 가만 눈을 감고 조금은 거친 내 목소리를 들어봐요. 그러나 내 히멀건 낯은 손바닥 둘로 가릴 틈을 얻지 못한 채 무너졌다. 얇디얇은 천 조각의 실내용 원피스를 걸친 몸뚱이는 바람의 거친 피를 소화 시킬 수가 없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미 내 전신을 휘감은 바람의 기운을 떨쳐낼 수 없었다. 몇 분 견디지 못하고 겨울 이불을 내와 덮었다. 바람으로부터의 수혈을 감당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무엇이 바람을 움직이게 했을까. 기압이며 기온 등 과학적인 요소 아닌 것으로 말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자연은 자기들이 발휘하는 힘에 대해서 순서며, 규칙이며, 절차며 성분 등을 대동해서 파악하려고 덤비는 인간 네가 우습지 않을까. 아하, 과학자들이시여. 당신들의 저력에 덤비는 것은 결코 아니니. 소시민이,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한 인간 네가 생각나는 대로 풀어내는 글귀이니 부디 무시하시라. 이어 쓰자.

 

 

현상에 대해 우리는 늘 과학적인 분석부터 시작한다. 인문학적 여자인 나는 여기에 반기를 들고 싶다, 가끔. 심리학적으로 풀어보고 싶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좀 덤벼보고 싶다. 바람은 왜 이렇게 갑자기 돌변한 것인가. 채 몇 시간 되지 않아서 이토록 180도의 반 회전을 한 것일까. 누가, 무엇이 바람을 건들었을까. 바람벽을 타고 올라가 벽에 얹혀 있는 기운을 잡아 쓰러뜨리려 한 것일까. 바람의 힘을 억누른 것은 무엇일까. 동안 차곡차곡 쌓아가던 힘을 세차게 내뿜게 한 것은 무엇일까. 우주의 탄생과 맥을 같이해 온 바람일랑 층층이 쌓은 연륜의 길이가 얼마나 길겠는가. 우리네 인간들이 쌓은 기운에 어디 비할 바가 있으랴. 녹슨 바람일지언정 그 녹슨 힘마저 왕성한 것이리라. 녹슨 것일수록 푸르뎅뎅한 녹이 지닌 독이 내뿜을 요소 또한 독하디독한 독일 지니. 인간의 머리로 구성할 수 있는 어떤 성분의 합리화인들 어찌 바람이 못 이기겠는가.  

 

 

만개를 향하여!

 

 

밤새 여름이 바쁘게 퇴진하고 있었다. 진영을 잃은 여름이 울고 있었던 것일까, 여름이 쳐뒀던 진을 점령하느라 침입한 가을의 고함이었을까. 밤을 앓았다. 진정 여름 녀석에게 안녕을 고해야만 했다. 바람이 다시 한번 삼라만상 한 바퀴를 돌아 지난해처럼 여름 다음의 계절에 다 달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돌변에 놀랄 따름이었다. 긴 팔 검정 롱코트를 휘날리며 걸었다. 롱코트는 십의 단위를 족히 살아낸, 내 청춘을 함께했던 가을용 코트였다. 여름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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