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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검은 고양이가 나의 사진 앨범 속 주인공일 것을 거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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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양이가 나의 앨범 속 주인공일 것을 거부했다.

 

 

 

소국 1

 

출근 준비. 얼굴에 몇 가지 기본 화장을 마친 후 의상을 고민했다. 긴 팔을 지닌 옷을 입을 것인가를 몇 분 고민했다. '어제 바깥은 긴 팔을 꽤 입었어.' 주말을 거의 집 밖에서 보낸 또 한 사람이 출근을 준비하는 내게 날씨를 언급하며 말해준 내용이다. 자꾸 떠올랐다. 초가을용 의상을 내렸다가 거뒀다. 종일 실내에서 지낼 것이므로 하복 그대로를 입었다. 혹시 몰라 간절기용 긴팔 외투를 걸치긴 했다. 팔만 길지 여름옷 천이다. 20분여 걷는데도 그다지 외투가 귀찮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기온이 제법 낮아졌음을 의미한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처음 만난 동물 생명체가 고양이였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걷고 있었다. 나는 내려가고 그는 올라오고 있었다. 삼거리 로타리 부근에서 본격적인 만남을 가졌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거리가 가까워지자 녀석이 멈췄다. 나를 아는 것처럼 빤히 쳐다보더니만 내 앞에 얌전히 뒷다리를 괴고 앉았다. '어여, 벌써 출근하는 길인가? 너무 이른 것 아녀?' 어릴 적 키우던 나비(할머니는 고양이를 줄곧 그렇게 불렀다.)와 이야기를 나누시던 때 할머니의 어조로 내게 말을 해오는 듯싶다.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할머니는 늘 그 곁을 충성스럽게 지키는 노란 고양이의 머리털을 쓰다듬으면서 말씀하셨다. '어여, 벌써 일어났는감? 좀 더 자지.) '어디 가는 길? 아침은 먹었어?' 내가 묻는다.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간다. 두세 걸음 앞인데도 고정 자세를 거두지 않았다. 나를 향한 시선도 바꾸지 않았다. 어떤 도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 올 움직임 없이 나를 바라봤다. 가던 길을 멈추고 녀석과 눈싸움을 벌렸다. 어떤 뜻이 숨어있을까, 저 눈과 저 자세에는. '왜? 내 얼굴에 뭐가 묻었니?' 나도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녀석은 변함없이 나를 바라봤다. 무엇이 궁금한 것인가. 나의 무엇이 녀석의 관심을 끄는 것일까. 혹은 내게 무엇을 주문하고 싶은 것일까.

 

유독 생생한 색상을 자랑하는~

 

 

아하, 녀석. 나를 빤히 쳐다보던 녀석. 네 외피와 닮은 꼴이구나. 너와 내가 똑같구나. 온통 블랙 패션! 녀석은 검은 고양이었다. 재빨리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인연을 폰에 담으려는 욕심이 생겼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찰칵! 아이고. 주말에 사진 찍기의 패턴을 바꾼 상태였다. 바로 찰칵을 했어야 했다. 어제 종일 '순간'을 살았으면서도 카메라에서는 '순간'을 버린 상태였다. 의도적으로 담으려던 중요한 한 장면을 놓쳤다. 내게 집요한 집중을 보이던 어느 검은 고양이. 다소곳이, 뒷다리를 고양이 고유의 형세로 꼬아 앉은 도도한 모습을 폰 필름에 담으려다가 그만 놓쳤다. 내가 폰을 꺼내 자기 얼굴을 향해 들이밀 때까지도 괜찮았다. 다섯, 넷, 셋, 둘을 할 때까지도 녀석은 당당했다. 다음, '하나'의 'ㅎ'까지 발음하였을까 하는데 그만 검은 고양이는 금방 일어나 사라져버렸다. 나를 두고 휙 떠나버렸다. 녀석은 재빨리 떠나고 빈 여백만 필름에 담겼다. 뒷걸음질로 자리를 피한 것도 아닌데 사진 속 빈공간에는 검은 고양이의 검은 꼬리털 한 가닥도 잡히지 않았다. 서운했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없을까. 그때는 강요하지 않을게. 그냥 서로 바라보는 것으로 족할 게. 

 

공식적으로 실외 마스크 의무 착용이 해제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일터에서 들은 소식으로는 '권고'란다. 어쨌든). 오랜만에 비비크림이라는 것도 바르고 눈썹도 단정하게 정리하고 입술에는 립스틱도 가볍게 발랐다. 마스크는 팔뚝에 끼고 걸었다. 내 오른쪽이 순백의 향연이었다. 전신 검은색 옷에 마스크 안쪽 면의 흰색은 더욱 맑고 청초했다. 마스크 안에 투명한 이슬 동그라미라도 담을 수 있다면 싶었다. 한번도 이물질 위에 걸치지 않은 마스크의 안쪽 벽면이 흰빛 우아한 공간으로 빛났다. 뭔가 담을 것이 있지 않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흰 벽은 순수함으로 도도했다. 이미 맑은 평온이 자리 잡아 앉아 있었다. 고른 호흡의 반복과 강조가 넘실거렸다.

 

호흡이 자유로우니 몸의 움직임도 활달해졌다. 보폭도 넓어지고 길어졌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의 강도도 강해졌다. 걷는 바닥이 흙이라면 어제는 0.0001mm 정도로 땅이 패게 했다면 오늘 걸음으로는 0.1mm 정도의 땅 깊숙이 내 신발자국을 자욱하고 으슥하게 찍었을 것이다. 무릎에서 느껴지는 건강함이 사뭇 현재 내 나이를 잊게 했다. 씩씩하게 걸었다. 건강한 아침이었다.  

 

고양이는 떠나고 빈 터말 남았다.

 

 

뒤늦게 아침 일기를 정리하면서 애드가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를 떠올린다. 혹 아침길에 만난 검은 고양이가 애드가 앨런 포우의 소설  '검은 고양이'의 후손이 아니었을까? 고양이가 사람에게 던지는 눈길이 어쩌면 그렇게도 현실적일 수 있는지 신기했다. 한 인간인 '나'와 검은 고양이 한 마리인 '나'가 만났던 아침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뚜렷하다. 잘 살기를! 나는 포우의 소설 속 주인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참 착한 인간이란다. 비겁하기는 더욱 아니고. 사람답게 살아내려고 많은 노력하고 있는 서민 누구누구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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