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콘도
오래전, 아주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었더랬다. 아마 사춘기를 살고 있었을 것이다. 노벨상 수상작 시리즈를 읽던 참이었을까. 남아메리카의 소설을 들추던 때일까. 아니면 아르헨티나 출생이면서 쿠바 정치가로 세기를 풍미한 '체 게바라'를 알고 싶어 하던 시절일까.
가족 중 내가 읽고 있는 책의 표지를 볼까 봐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선하다. 천재 소녀이자 시인으로 통하던 나의 둘째 언니에게도 소설 제목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끊임없이 진행되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이상한 짓거리는 나의 상식에 도무지 살아있는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유교상주의와 철저한 가부장도의 그늘에서 오직 '공부'가 전부라는 기치 아래 살아가던 나는 망연자실할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짓들이 글 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몇 대에 걸친 한 가족의 욕된 가계도에 치가 떨렸다. 그런데도 밤잠 참으면서 끝까지 읽게 했던 소설이었다. 명작이었다.
내가 내린 결말은 '인간계 이럴 수도 있구나'였다. 얼마나 백치스러운가. 물론 이 일 저 일 다 보고 살아낸 지금의 내게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은 구구절절 질질 끌리는 인간사의 단면임을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다. 얼마든지 가능한 현실보다는 덜한 소설임을 판단할 수 있다. 사사건건 연결되는 사랑놀이가 결코 참사랑이 되지 못하는 온 가족의 방황이 진정 인간사임을 넉넉히 아우를 수 있다. 카드던가, 포커? 어른들이 놀이하던 날 탁자보가 쳐진 둥근 탁자 아래 제 어미가 제 아비가 아닌, 그렇고 그런 사람과 보 아래서 나누던 섹스를 지켜보던 한 소년이 그려진 삽화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순수의 시절을 살던 나는 그 소년이 불쌍해서 눈물까지 흘릴 지경이었던가? 돌아 도는 근친상간이었다. 인간사 근본적인 순환 원리며 '태초에~'로 시작되는 종류의 인간사 타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신화와 절친해지기 등을 바탕으로 여러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소설이었다. 다시 한번 들먹이는데 명작이다. 더 어른이 되어 꼭 다시 읽으리라 다짐했던 듯도 싶다.
며칠 전 일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름을 지을 때 제1 조건이 '어감'이라고 한다. 이때 '어감'은 단순히 이름을 입으로 말할 때 느껴지는 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발음하는 이나 누군가 이름을 부를 때 듣는 이의 느낌을 포함한다. 한 사람의 이름이 불릴 때 떠오르는 모든 이미지도 포함할 것이다. 이미지에는 그 이름으로 살았던 여러 공인도 있을 것이다. 글자가 연계하고 있는 수많은 함축이 따를 것이다.
오늘 아침 출근길을 그 소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이 고독>이 함께 걸었다. 소설의 주 무대 지역인 '마콘도'에 꽂혔다. 강의자의 강조 때문이기도 했다. 내게 인상 깊게 남아있는, 소설 속 삽화들이 떠오를 정도로 소설 강의 중 공간적 배경을 붙잡은 것은 '어감'이라는 낱말 때문이었다.
아침 일기라는 것을 쓰면서 새삼 내 하루 생활에 제법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어휘'이자 '어감'이다. 아침 일기 글이래야 하루 한 번씩 여러 잡 생각을 나열하는 수준이다. 그날 내 뇌리에 꽂힌 낱말이나 구절 혹은 사건, 인물 등을 언급하는 소소한 글이다. 그리하여 오늘 내 출근길을 사로잡은 낱말이 '마콘도'이다. 열심히 감동적으로 읽었지만 기억에 남아있지 못한 '마콘도'이다. 농장 '마콘도'
내가 소설을 쓴다면 어떤 이름의 주 무대를 택할까. 가끔, 아주 가끔 소설이라는 것을 써 보고 싶을 때 나는 겨우 등장인물이 지녀야 할 제 요소만 떠올려보곤 했다. 주 무대, 공간 등에 대한 것은 좀처럼 떠올린 적이 없다. 이유가 뭘까. 작가는 유목에 가까운 삶을 살아 해서 소설 공간에 주목한 것일까. 나는 그야말로 넉넉한 부모가 정해준 일정 지역에서 아무 걱정 없이 의식주가 편안했던 때문일까.
마르케스가 언급한 '마콘도'도 어감때문이었단다. '마콘도'라고 발음하는 순간 세 글자로 이루어진 이 낱말을 듣는 순간 귀가 확 트였단다. 어린 시절부터 조부모와 살던 것을 시작으로 늘 혼자 떠돌던 마르케스이다. 거의 방목이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옛 시절 살던 곳을 찾아가게 되었단다. 추억 속 옛 공간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대로 있던 것이 '마콘도 농장'이다. 옛 추억이 때문이었을까. 농장의 이름 '마콘도'를 발음하던 순간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온 소리의 조화에 깜짝 놀랐다. 화음이 달팽이 공간을 돌아 청신경을 자극하면서 발생시킨 리듬감과 음악적 감각에 감동하였다. 그는 자기 소설 속 공간으로 꼭 이용할 것을 다짐했단다. 작가가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은 나무의 종류더라는 마콘도.
가만 내게도 내가 발음하고 내 구강이 내놓은 소리에 내가 푹 빠졌던 낱말들이 있는가. 마르케스처럼 어느 공간에 주목해서 생각해보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추억이 빈약하다. 초라한 정주 생활이었다. 안락함과 편안함은 함께 했겠으나 이곳저곳으로 뚫고 나아가려는 방사형 인간은 될 수 없었다. 끈질기고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려는 의지도 역부족이다. 눈앞에 주어진 일거리로 마지 못해 사는 월급 맞춤형 인간. 참 재미없는 삶이다.
물론 지금도 늦지 않았다. '곳'에 주의 집중해 보자. 우연히 지나는 길일지라도 어떤 곳의 지명 혹은 공간의 이름을 눈여겨보자. 마르케스처럼 거창한 일대기적 소설을 쓸 수 없을지언정 혹 아나, 죽음 직전의 노년에 하늘을 뒤흔들 정도의 우주 어느 조그마한 곳에 사는 일가족 일대기를 써낼 수 있는 최고령 소설가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오늘은 추분! 절기상 본격적으로 가을 입성이다. 자리를 내줘야 하는 여름이 자꾸 가기 싫다고 징징거리는 것이 느껴져서 하복 그대로에 긴 외투를 걸치고 나왔다. 몇 분 걷다가 벗어 팔에 걸었다. 멈추면 가을, 움직이면 여름이다. 내 몸 생체 시계의 계절에 대한 감응이다. 내 몸의 의견을 존중한다. 내일 하려던 옷걸이의 여름옷과 가을옷 교체 시기를 연기한다.
퇴근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다. 바닥이다. 잔뜩 기대했던 아침 기운이 추락의 날개를 타고 처박힌 곳이 피곤이라는 낭떠러지이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를 덮쳐오는 불순의 외압에 혈압은 치솟았다. 당도는 움직임 불가능의 정지 상태가 되어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다시 평온 비슷한 것을 조금 되찾았다. 사실 퇴근 후 링겔이라도 좀 맞고 샅샅이 도려진 내 감성을 좀 추스릴까 싶었다. 조절이 필요하다. 적당히 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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