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과 사할린이 왜 내 안에 공존해 있었을까.
다행이다. 기상 알람에 눈을 떴다. 평소 하지 않던 일을 했다. 나의 티스토리 블로그를 검색하였다. 사할린. 어제 종일 딱 한 가지 생각으로 살았다는 것이 왜 그렇게도 든든했을까. 나의 뇌세포가 쓰고 싶은 내용으로만 독후감을 써 보자 했고 제대로 실천한 것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누가 알까. 앞뒤 가릴 것 없이, 혹 내 블로그의 글을 읽을 독자들도 상관하지 않고, 마구 써 보기로 한 것을 야무지게 해낸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이었는지 어떻게 자랑을 할까.
책은 대부분 구매하여 읽는 편이다. 밑줄 긋는 습관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을 읽어도 나를 사로잡는 문구들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구를 행위로 옮긴다. 공책에 베껴보고자 한다. 어쩌다가 한번 가능하지만 못하더라도 밑줄 그은 내용을 책장을 넘겨 가면서 다시 읽어볼 수 있는 것이 참 좋다. 책을 펼치면 나 이 책을 읽었네 하는 태를 낼 수 있다는 것도 참 행복하다. 아무도 그것을 확인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대여해 와서 읽었다. 김훈 선생님의 글 곳곳에는 김훈 선생님 표를 드러내는 문장이 페이지마다 있다. 그러나 줄을 그을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읽으려니 했다. 나아가 나중에 한 번 더 대여하여 글을 한번 베껴보려니 했다. 책은 이미 도서관으로 반납하였다. 인상적인 문장을 옮겨쓰기도 할 수 없었다. 문맥에 흐르는 김훈 선생님의 의도를 뚜렷하게 기록할 수 없었다. 하여 야무진 생각을 해낸 것이다. '오직 내 머리에 있는 것으로만 독후감을 써 보자.'
어제 출근하여 바로 독후감을 썼다. 제목을 입력하였다. 블로그 친구들의 시선을 끌게 하는 제목을 생각해봤다. 읽고 싶은 마음이 동요하게 하려면 어떤 제목을 붙일까 고민하였다. 진도는 더 나아가지 못했다. 우선 책 제목만 썼다. 차고 쓸쓸하고 울울하고 울분에 차 있는 진 회색빛 하늘. 그런 공간적 배경을 내 머리 속에 펼쳤다. 안중근과 우덕순이 걸었을 중국 땅 거친 대기를 나도 함께 호흡하였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었으니 서로를 사위어 볼 겨를은 마련하지 않았다. 이심전심의 전형을 살지 않았는가. 둘은 일을 벌이자는 것부터 시작하여 그 어느 것도 서로의 생각을 확인할 필요가 없지 않았는가. 이를 어찌 글 속에 표현할까를 집중하기로 하였다. 둘의 공통점을 한 문단으로 쓰기로 했다.
가장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것을 떠올려봤다. '고르다', '변함없다', '지고지순하다', '단정하다', '흐트러짐이 없다' '꿋꿋하다', '단단하다' 등은 두 분의 생을 한곳에 모은 내용을 대표할 수 있는 낱말이나 구절이다. 놀랄 정도로 굴곡 없는 안중근의 마음 수평선과 우덕순의 티끌 한 점 찾을 수 없는 투명 순수를 대변할 수 있는 낱말들이다. 각각 한 문단을 배당해야 한다.
생애 정리는 안중근의 생을 모아서 편집하기로 했다. 안중근을 아는 이 그 누가 모르랴. 그가 외친 유명한 문구를 인용하기로 했다. 그의 거사 실행 의지를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문장이다. 큰일을 하신 이의 풍모가 한껏 읽어지는 문장이다. 동양 평화론을 말하는 문장이다.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생을 살아내신 안중근의 모든 생을 함유한 문장이다. 누가 안중근을 따를 수 있겠는가.
수많은 김훈의 문장들을 옮겨 적을 기회가 이번에는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총론 식의 문단을 두셋 구성하기로 했다. 너무도 뚜렷하여 김훈 선생님이 아직 발행하지 않으신 글이 있다면서 내게 읽게 한다면 여러 글 중 김훈의 글은 다섯 장의 글을 넘기지 않아도 바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이 문장이 김훈 글이라며 정확하게 분석해낼 수 있다. 어찌 김훈 글을 읽으면서 그렇고 그런 류의 글에서 끝날 수 있겠는가. 출발선 그대로 마구 쓰는 글에 집중하자. 책을 읽은 후 내게 아직 머무르고 있는 김훈 문장들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적자. 한두 문단 혹은 서너 문단도 될 수 있겠다. 자칫 '작가론'이 될 수도 있겠지만 각오한다. 꼭 쓰기로 한다.
아침 시간에 대여섯 문단을 쓸 수 있었다. 생각 주머니 안에 담아 다니다가 퇴근하여 본격적으로 썼다. 내가 쓰고 싶은 글 그대로를 실현에 옮기기로 했다. 마치 부대 하나를 꾸려 전의를 불태우는 것처럼, 어금니를 꽉 물고 실천 의지를 불태웠다. 열심히 썼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글자를 입력했다. 이제 그만하자고 외치고 나니 시각을 꽤 되어 있었다. 뿌듯했다. 내 머릿속 생각을 꾸밈없이 내놓았다 싶으니 누군가를 붙잡아 뻐기고 싶어졌다.
사진을 넣지 않기로 했다. 오직 책 표지만 '예스24'에서 가져오기로 했다. 예스24를 켜서 검색어로 '하얼빈'을 입력하였다. '하얼빈'은 김훈 소설이라는 부수어를 데리고 모니터에 떴다. 하. 얼. 빈. 쓰리 디는 아니었다. 2.5 디 정도의 입체적인 장식이었다. 딱 세 글자의 지명이 말끔하게 종이 위에 서 있었다. 청결했고 정갈했다. 판 위에 '하'와 '얼'과 '빈'이라는 글자를 세우고 시시콜콜 오염물질들을 일부러 찾아 쓸어낸 듯한 깔끔한 모양새. 이곳 블로그에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가 된 파일을 열어 올렸다. 존엄이라는 낱말을 붙여 올림 의식을 치렀다. 보통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어느 누가 읽어도 알아챌 내 글도 함께 우뚝 섰다. 우아한 변신의 예를 거친 것 같았다.
맞춤법 단계까지 거치고 나니 안온한 밤을 치르고 싶어졌다. 이불 속에 엄지발가락만 집어넣어도 잠에 푹 빠질 것 같았다. 늦은 시각에 반신욕을 한 것이 안타까웠다. 긴 머리카락이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최고의 낮음을 지닌 바닥을 찾아 내 몸을 누이고 은은한 따뜻함을 마련하여 내 육신의 피로를 녹이고 싶었다. 재빨리 컴퓨터 모니터를 끄고 아날로그 공책 일기를 썼다. 스으윽 역류성 식도염 환자 맞춤 침구에 뼈대를 맞춰 몸을 눕혔다. 수면이니, 불면이니 떠나 우선 몸의 평온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 영화 <디파이언스>의 3분의 1을 보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잠 속의 나는 거리에 서 있었다. 이곳이 어디일까. 아스라이, 희미하게 형태를 숨긴 생물들이 꾸물거리는 거리였다. 생물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소란하고 분란한 생물들을 바라보는 이들 둘이 내 곁에 서 계셨다. 사람다운 사람 둘이 사람 같지 않은 생물체들을 바라보고 계셨다. 할 일을 한 것뿐인 듯 차분한 양반다리로 바닥에 자리하셨다.
6시가 되었나 보다. 본격적인 새날이 시작되었다고 나를 깨우는 누군가가 있나 보다 싶었다. 눈을 뜨고 핸드폰을 켰다. 느닷없이 내 손가락은 플랫폼 'daum'을 찾았다. 기억하고 있는 검색어 목록을 열었다. 친근한 낱말이 보였다. 언젠가 다음을 통한 나의 블로그 검색을 한 적이 있다. '탈피하자' 였다. 클릭을 했다. 광고를 지우니 '홈'과 '방명록'과 '관리창'이라는 메뉴가 세 줄 가로로 서 있었다. 홈을 클릭하였다. 첫 글이 보였다.
사. 할. 린. <사할린>이었다. 공포였다. 어젯밤 올린 블로그의 제목은 <사할린>이었다. 인간사 이러는 수도 있구나. 왜 사할린이었을까. 나는 왜 책 <하얼빈>을 읽고서 제목을 <사할린>으로 입력한 것일까. 어쩌자고 글 초입에 <하얼빈>이라고 쓰인 표지를 검색해서 올려놓고서도 바로 위 제목은 <사할린>이어야 했을까. 컴퓨터를 켰다. 수정했다. '사할린'을 버리고 '하얼빈'으로 바로잡았다. 어쩌자고 내 머리에 <사할린>과 <하얼빈>은 공존했을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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