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에 묻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것 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
옛날, 뭐, 그리 오래된 옛 시절은 아니다. 김○○이라는 드라마 작가가 계셨다. 지금도 살아 계시다. 종편 방송이 없을 때의 사람이다. KBS며 MBC가 대한민국의 방송을 주도하던 때를 나와 같이 사시던 분이시다.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죽자 살자 본방 사수하면서 본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그녀를 기억한다. 그녀 김○○은 시청률 50%를 넘은(혹은 그 가까이까지 간, 사실 정확한 것은 기억에 없다, 어쨌든 굉장한~) 국민 드라마라는 것을 여러 편 쓰셨던 분이다.
오늘은 그녀 이야기를 좀 할 참이다. 종이 신문 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신문을 꼭 구독했다. 몇 년 전까지도. 구석구석 놓여있는 글까지 읽곤 했다. 어느 날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내 고정 미장원이었던, 내가 살던 아파트 상가 2층의 음흉한 색깔의 실내장식 속에서 읽었을까. 그곳에서 가져와 늘 여성지를 읽고 보곤 했던 나의 거실에서 읽었을까. 아, 진짜로 종이신문 기사로 읽었을 수도 있다. '특집 기사, 국민 드라마를 또 썼다~'식의 기사일 수 있다. 어쨌든 읽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녀의 드라마 소재 얻는 방법이 내 눈을 붙잡았다. 그녀도 나처럼 종이신문을 읽는다고 했다. 다만 나와 다른 것이 여럿 읽는다고 했다. 매일 꼭 읽는다고 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또 얼마나 나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아마 이 글을 읽고 '나는 분명 글쓰기의 재능이 대단한 사람일 거야. 대한민국의 일류 드라마 작가와 하루 생활 중 한 가지가 똑같아.'라는 생각에 긍지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은근히 '나, 이런 사람이야.' 식의 자랑도 좀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도 나처럼 아주 상세하게 신문을 읽는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녀는 심지어 '부고란', 그 아래, 아주 조그마한 면적에 있는, 귀퉁이를 아주 작게 차지한 사건 사고 코너까지 열심히 읽는다는 것이었다. 그쯤에서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아직 자랑거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신문을 읽는 방법이 나와 달랐기 때문이다. 제대로 알량한 삶을 사는 나는 좀스러운 찌꺼기 같은 사건과 사고란을 읽지 않았다.' 왜 이런 류의 글을 기사화할까?'라는 의문까지 지니고 있을 만큼 우습지만, 거만한 인간이다.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드라마의 소재를 얻을 수도 있다는 글이 더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그러노라고, 그런 방법으로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한 이는 당대 이 나라 최고의 드라마 작가였다. 은근히 눈치가 보였다. 어쨌건 그녀는 저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의 숨겨진 하루하루 한살이를 들춰보니 결코 잘못된 판단이 아니라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대체 누구 아무도 눈길 주지 않을 것이라 여겨지는데, 허드레 같은 사건 사고 기사에서 뭘 얻는다는 것인가.
다음 날부터 나의 종이신문을 읽는 시간은 물론, 크게 늘었다. 열심히 읽고 부지런히 읽고 꿰뚫어가면서 읽었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읽고서 한 줄로 요약하기를 몇 달 했을 것이다. 서너 달 혹은 1년여 넘게 했을 것이다. 글을 읽으면 한두 문장으로 요약해서 써 보는 것이 글쓰기의 기본이라는 것을 수없이 배워왔다. 배운 것을 써먹어야 하지 않은가. 적어도 나는 글을 좀 쓰자고 생각하던 참이기도 하였다. 내 청춘의 열정이 팍팍 솟아나던 시기였다. 얼마나 진지했겠는가.
그러나 그때 그 시절 나의 역사는 사라지고 없다. 어느 날 '나의 흔적 지우기' 행사 때, 나의 최선을 쏟았던 내 청춘의 붉은 기운들을 잿빛으로 화장시켰다. 일기들과 함께 나의 기록들은 은회색 잿더미로 바스러졌다. 잠시 후 진회색 가루가 되어 날아갔겠지만. 보통의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정리는 '흔적 없애기'라는 사실에 꽂혔던 또 한 시기가 내 인생에 있었다.
어젯밤 블로그 일기를 올리고 컴퓨터를 끄려던 순간 내 눈을 휙 사로잡은 사진 한 컷이 있었다. 클릭했다. 요즘 내가 입고 싶어 하는 원피스였다. 복부를 압박하지 않은, 권세를 부리지 않은 자유 허리선으로, 몸이 꽉 끼지 않은, 그러나 평범한 듯하면서도 패셔너블한, 그럴듯하게 고상하기도 한 검은 드레스였다. 그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델이 앞에서 띄운 드라마 작가 김○○의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나왔던 배우였다. 그녀는 그 드라마에서 연예까지 성공하여 현실에서도 부부가 되었다고 들었다.
다재다능한(크크크크~ 이런, 웃긴 여자여!) 나는 패션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다. 가끔 간단한 소묘로 내가 만들 고 싶은 옷을 그려보기도 한다. 그녀가, 그녀가 입은 원피스의 라인을 그리면서 나의 옛 추억을 소환하였다. 아름다운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구나.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머리로 드라마를 썼던 나의 생활. 장면 장면이 슬로비디오와 퀵 비디오를 왔다 갔다 하면서 슈욱 지나간다. 남은 겨울이 더 많아서 아껴 입는 코트들. 이 험한 기온에 2단계의 코트로는 너무했다 싶어서 3단계의 코트를 취하여 나왔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서 만난 첫 바깥 기온이 내게 어젯밤을 데려왔다. 그리운 나의 옛 시절 모셔왔다. 쓰담쓰담 쓰다듬디 담~. 겨울 이른 아침에 애먼 노래까지 회상의 숲으로 모셔왔다. 내 늙은 나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내 좋아하는 (2인 밴드였다가 지금은 1인 밴드인) '십센치'의 노래 중에 '쓰담쓰담'이 있다. 재미있는 노래다. 나는 그냥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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