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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아침이 참 거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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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참 거창했다.

 

 

 

오늘 아침 출근길의 하늘은 장대한 한 폭 천지창조였다.

 

 

반신욕을 올바르게 하는 방법. 오늘 아침 출근길 유튜브에서 제일 먼저 들은 강의이다. 반신욕을 끝내고 일어나는 순간을 조심해야 한다. 39도에서 40도를 오르내리는 온도의 물에 배꼽 정도까지만 담그라. 손도 육신의 윗부분이라 할 수 있다.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지 마라. 기온이 낮아지면서 반신욕을 시작한 것이 사흘째이다. 확실히 어두운 밤을 견뎌낼 몸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하루를 살아내면서 짊어져야 했던 속수무책이며 설상가상 등의 짐이 희미해진다. 

 

나의 반신욕 습관을 떠올려보면 끝낸 후 일어나는 순간의 위험성에 주목해야겠다. 물 속 따뜻한 물에서 상승한 혈압이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갑자기 낮아져서 빈혈을 일으킬 수 있단다. 시간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되겠다. 적당한 반신욕 시간으로 2, 30분이면 족하단다. 나는 보통 한 시간이다. 두 시간을 넘어설 때도 있다. 잘 알고 있는데도 지나치곤 한다. 반신욕을 하는 데에도 욕심을 끼운 것일까. 어떤 종류의 욕심일까. 

 

 

오늘 아침 출근길 2

 

 

내 좋아하는(모시다시피 하는) 영화평론가 이동진 선생님이 자기 영화 평점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는가를 실험해보는 짧은 시간의 영상도 봤다. 재미있었다. 이동진 선생님의 삶이 참 부럽다. 이동진 선생님의 물속 독서습관에 힘을 얻어 나도 반신욕을 할 때면 꼭 책 읽기를 함께 한다.

 

이어 중국 현지에서 생활하시는 분이 중국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전문가 수준으로 말씀해주시는 강의를 들었다. 중간에서 그만 멈추고 말았다. 아침 하늘이 펼치는 구름의 파노라마에 듣고있던 유튜브 주소를 건드리고 말았다. 어쨌든 오늘 아침 서너 개의 유튜브 영상을 들으면서 내 머리에 남아 있는 어휘와 구는 '경계' 그리고 '경계선'과 '선 넘기'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에 관한 내용에서 떠올렸다. 미국과 중국, 그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인 우리나라의 입장에 기인한 것이다.

 

경계(境界)란 어떤 분류 기준에 정해두고 이쪽과 저쪽, 이것과 저것 등이 구분하고 분간하는 한계이다. 여기에 '선(線)'을 붙여 '경계선((境界線)'이 되면 말 그대로 경계가 되는 선이다. 경계선을 넘으면 '선 넘기'이다. '경계'와 '경계선', '선 넘기'라는 낱말과 구를 들고 오느라 경비 할아버지께 드리는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감사했다. 재빨리 4층으로 뛰다시피 하여 올라갔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 일터 문을 열고 컴퓨터를 켰다. 

 

빈터 일년생 화초 동산 일부

 

 

경계는 근본적으로 구분을 짓고 분류를 하기 위함이다. 편리와 원활한 융통 등을 위한 단순한 가르기에서 시작되었을까. 그랬다면, 그런 단순함의 단계에 머물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경계 그리고 경계선, 선 넘기의 현대적인 의미는 국가 와 국가의 경계선이 생성되던 순간을 살펴보면 느껴진다. 이 두 낱말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산업혁명이 일면서, 식민지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절차였다. 선 그어 내 것, 네 것 그리고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기였다. 그 선 너머 너의 공간을 너의 선 반대편 너머 내가 취할 수도 있음을 함의한다. 선은 잠시 명분일 뿐, 언젠가 나의 것이 될, 공개된 비장품일 뿐이라는 의미를 함축한 채 그어진 것이다. 

 

출근길 하늘

 

 

산업혁명이며 식민지주의는 역사이다. 그 역사를 사는 인간들은 그럴싸한 이유를 대기 위해 역사를 만든다. 세운 역사를 따른다. 역사를 갈고 닦는다. 매끄러워진 역사는 경계를 더 굳건하게 하고 경계선을 더더욱 날카롭게 그어 강조한다. 굳어지고 날카로워진 역사 안에서 사람들은 각자 삶을 달군다. 더 많은 물질을 챙기기 위해 역사의 판을 긁고 뒤집고 일상의 밭을 악랄하게 가꾼다. 심은 것들이 굵어지면 생명체들의 기반과 그 기반 위에 세워진 모든 것을 갈취한다. 바로 선 넘기이다. 이때 판과 밭은 모두의 것이다.

 

역사를 사는 개인사도 철저하게 역사를 궤적을 그대로 따른다. 선 너머 모든 것에는 경계 너머 사람의 소탈한 생이 함께 있다. 그 생을 쓸어온다. 어쩌다가 쓸려온 것일까. 갈취한 사람들은 함께 오는 것들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다. 그들은 소탈한 사람들이 가꾸는 것에 숨겨진 삶의 의미와 연륜이 필요했다. 얍삽한 삶을 사느라 미처 다지지 못한 삶의 기반이 필요햇다. 그리하여 보통 사람들의 가는 소망은 흔적도 없이 사살하고 짓밟는다.

 

경계와 경계선 그리고 그 너머를 넘보는 삶은 온전히 '나'만. '우리만'을 실현하기 위한 이기주의이다. 욕심이다. 역사의 거창함을 끌어와 펼치니 그 바닥을 흐르는 인간의 삶이 참 애달프다. 그 삶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간들이 참 애처롭고 쓸쓸하다. 한편 미안하고 딱하고 아프고 가엽다.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거든 구하는 데에서 그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멈춰야 할 점을 무시하고 넘어서서 탐하지는 말았으면. 탐욕에 눈이 멀어 이미 지닌 것조차 마침내 부스러뜨리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주는 만큼 받고 주는 대로 받는다. 뿌린 대로 거둔다. 사람이든지, 사회이든지, 국가이든지 간에 부디 내 것 부여잡고 사는 데서 기꺼이 멈출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침이 참 거창했다. 다 쓰고 나니 영화 '경계선'이 떠오른다. 처참한 슬픔과 아름다운 사랑이 동행하는 영화. 다시 보고 싶다. 영화 감상문도 다시 써 보고 싶다. 


 

그곳

 

저녁 식사를 브런치로 하느라고 퇴근 시간이 바빴다. 아침과 점심 사이 늦은 오전의 양식이 아닌 그저 간단한 음식을 의미하는 브런치였다. 북적거리지 않아서 참 좋은 곳이다. 아침 일기를 제대로 수정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문맥의 흐름을 파악하는 정도만을 보자고 덤볐는데 글의 전체 흐름을 가누는 중심 내용이 무엇인지 글을 쓴 나조차도 애매하다. '그러려니'로 때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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