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머리 늙은 소녀에게
여름 어느날, 한양을 다녀왔던 적이 있다. 올 한양 나들이 둘은 모두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 중 첫 번째. 시 조카의 결혼식. 한양의 복잡한 구조를 알지 못한 관계로 한양 사람 다 된 손위 언니의 안내로 예식장에 갈 수 있었다. 일주일 후 아들의 결혼을 앞둔 언니는 혼사를 앞둔 관계로 예식장 해당 구간 너머의 구역에 있기로 했다. 한 층 아래 칸 간이 의자에 앉아 있기로 했다. 아들 혼사 준비로 시간이 널널한 때가 아닌데 시골 사람들이 서울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미안했지만 어쩌랴,
식당에 들러 떡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가지고 나오려니 했는데 언니가 먹을 떡은 커녕 우리 내외가 먹는 점심도 가파른 계곡 탐사 못지 않았다. 결혼을 하는 앞 팀이며 뒤 팀 그리고 우리 팀. 이 팀 저 팀 혼합이 된 채 점심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줄은 지상에서 가장 긴 뱀 또아리 틀었던 것을 풀어낸 것처럼 길었다. 가까스로 식전 점심을 들고 식장으로 들어서니 바로 식이 진행될 즈음.
혼주되는 이들에게 부리나케 들어가서 눈 인사를 하려니 했으나 이미 가까이 갈 수 없는 거리. 시골 사람들을 고려한 목사님들의 짧은 기도 끝에 삼십 여 분의 혼인식이 끝났다. 다행이었다. 신랑 신부, 혼주 남여에게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니 언니는 아래 층에서 단식 중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려 어서 일어서려니 했다.
하루 왕복으로 한양 이동을 마무리하려니 바빴다. 급히 돌아서려던 찰나 손아래 동서가 나를 불러세웠다.
"형님, 얼굴이 왜 이래요? 살이 너무 빠졌어요."
"아하, 아마 파마를 할 때가 되었는데 하지 않아서 그러나 보다. 곧 할 거야. 그럼 괜찮아 보일 거야."
"형님, 이제 머리 좀 짜르지 그래요? 그 나이에 무슨, 그렇게 긴 머리를. 어디 봐요. 형님 나이에 그렇게나 치렁치렁 긴 머리를 하고 다니는 이 있나."
바로 위 문장은 사실 내 생각이었다. 동서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이 이 경우에도 어울릴까. 곧 파마하겠다는 답에 뜨악한 눈빛으로, 깜짝 놀란 듯한 황당함을 담은 눈으로 나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동서의 눈. 너무 매서워 나는 위 문장을 동서가 꼭 말하고 싶은데도 참고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분명 하고 싶었을 거다.
나는 이미 몸과 마음 꽤 곤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긴 머리이다. 그 다다음 주에 치렀던 한양행은 손위 언니네 나이 꽉 찬 40세 조카의 결혼식이었다. 내 머리카락의 길이에 대해 늘 한 마디씩 하는 언니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애, 너는 왜 그렇게 사니? 옷도 좀 이쁘게 입고 머리카락도 좀 자르고."
등등의 문장을 내놓곤 했던 언니들이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천사표 멋쟁이 둘째 언니는
"애, 너, 머리 좀 한쪽으로 치워."
였으며 큰 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포기했을까. 이렇게나 긴 머리카락인데도 언니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하는 것을 보니 괜찮나 보다 싶었다.
친정 조카 결혼식은 1박 2일로 다녀왔다. 내 긴 머리에 아무 말이 없었던 관계로 당분간 이 상태의 길이를 더 하고 다니려니 했는데 그날 밤 꿈 속 광경이 다음과 같았다.
"애, 한 여자 있었어. 아주 긴 머리 여자야. 머리카락 끝이 발 뒤꿈치에 닿을 만큼 길었어."
손위 언니가 검은 꿈 속에 환한 얼굴을 밝혔다.
"그래서~"
"근데 말야. 머리카락이 참 이뻤나 봐. 한 젊은 총각이 그녀를 좇아 줄곧 따라왔지. 사실 긴 머리 여자는 그 젊은 총각을 의식하지 못했어."
"왜?"
"긴 머리 여자는 이 어린 남자와의 자기 인연은 전혀 있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야."
"그런데?"
"젊은 총각은 사나이 대장부 기필고 맘 당기는 일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덤볐지."
"그리고?"
"열심히 걷고 걸어서 긴 머리 여자 앞에 떡 하니 선 거야."
"엥?"
"뒷모습과 가는 옆모습에 그만 반한 것이지."
"어찌 됨?"
"오, 하나님, 늙은 여자, 지 앞날도 모르네요. 이런 미친. 젊은 총각이 외친 말이었어."
"엥?'
"오, 하나님 이 미친 여인네. 제 배알도 모르남요? 어찌 저리 눈 한 번 까딱 하지 않고 저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세상에나, 세상에나, 뒷모습은 20대인데 앞으로 가 훔쳐보니 아니었어요. 적어도 50대 혹은 60대가 될까요. 늙은 소녀. 늙은 할머니. 이 바쁜 날, 종일 따라다녔어요. 제가 미쳤지요, 미쳤어요."
"그리고~"
"그 여자의 머리카락이 불쌍해요. 정말로 아직 젊고 얼굴도 예쁜 아가씨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 여자 혹시 사기꾼이 아니에요? 이렇게 이어서 젊은이가 말했어."
"엠병~"
한 마디씩 내던지는 문장은 나의 것이었다.
나의 불면의 밤은 짧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꼭, 하루 있었던 일 중 한 가지씩은 꿈으로 엮어진다. 눈을 뜨니 자꾸 한쪽으로 머리카락을 옮기라던 둘째 언니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전 시 조카 결혼식에서 내 차림새와 얼굴, 푸석하게 두둥실 내 머리카락을 불쌍히 여겼던 동서의 말과 표정도 떠올랐다. 그 꿈 끝 새벽에 눈을 떠서 출근 준비를 하면서 내 머리카락들에게 외쳤다.
"미안. 어떡하냐. 미치지도 않았고 제 정신도 맞지만 쬐끔 제멋대로 사는 여자, 한 여자 있어 이 나이 먹도록 이리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으니. 나, 긴 머리 늙은 소녀란다. 미안!"
지금껏 나는 여전히 긴 머리이다. 아직 파마도 다시 하지 않았다. 올해들어 딱 한 번 파마를 한 듯 싶다. 한 달 여 이 길고 더부룩한 머리카락을 더 짊어지고 다닐 참이다. 나는 미장원에 앉아있는 시간을 견디기가 참 힘들다. 고통이다.
왜 사람들은 여자 나이 깊어지면 꼭 머리카락을 짧게 하고 다녀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다 된 나이에도 인내심과 충성심과 철벽성을 가미하여 긴 머리를 유지하겠다는데 뭔 문제인가. 퇴근 후 머리를 감으려 준비하는데 갑자기 지난 여름 이 긴 머리를 안고 두 개의 결혼식에 참여하는 것은 꽤 괜찮았다는 결론을 미리 만들어 놓고 글을 쓴다. 새삼 떠오르는 하룻밤 꿈과 함께. 긴 머리, 이미 얇아진 머리카락이지만 보슬보슬해진 촉감까지 사랑하고 있는 늙은 주인 여자가 시대 저항(?) 정신을 발휘하여 글을 쓴다.
'늙은 여자, 긴 머리 좀 했다소니 뭐 어떻소?'
하, 어쨌든 하루 한양 왕복은 쉽지 않더군. 다행히 버스는 프리미엄 급이었다 .아, 아니 기차를 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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