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이프/하루 공개

긴 머리 늙은 소녀에게

반응형

 

 

긴 머리 늙은 소녀에게

 

나의 머리카락 뒷모습은 어떨까? 1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여름 어느날, 한양을 다녀왔던 적이 있다. 올 한양 나들이  둘은 모두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 중 첫 번째. 시 조카의 결혼식. 한양의 복잡한 구조를 알지 못한 관계로 한양 사람 다 된 손위 언니의 안내로 예식장에 갈 수 있었다. 일주일 후 아들의 결혼을 앞둔 언니는 혼사를 앞둔 관계로 예식장 해당 구간 너머의 구역에 있기로 했다. 한 층 아래 칸 간이 의자에 앉아 있기로 했다. 아들 혼사 준비로 시간이 널널한 때가 아닌데 시골 사람들이 서울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미안했지만 어쩌랴, 

 

식당에 들러 떡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가지고 나오려니 했는데 언니가 먹을 떡은 커녕 우리 내외가 먹는 점심도 가파른 계곡 탐사 못지 않았다. 결혼을 하는 앞 팀이며 뒤 팀 그리고 우리 팀. 이 팀 저 팀 혼합이 된 채 점심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줄은 지상에서 가장 긴 뱀  또아리 틀었던 것을 풀어낸 것처럼 길었다. 가까스로 식전 점심을 들고 식장으로 들어서니 바로 식이 진행될 즈음. 

 

혼주되는 이들에게 부리나케 들어가서 눈 인사를 하려니 했으나 이미 가까이 갈 수 없는 거리. 시골 사람들을 고려한 목사님들의 짧은 기도 끝에 삼십 여 분의 혼인식이 끝났다. 다행이었다. 신랑 신부, 혼주 남여에게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니 언니는 아래 층에서 단식 중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려 어서 일어서려니 했다. 

 

나의 머리카락 뒷모습은 어떨까? 2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하루 왕복으로 한양 이동을 마무리하려니 바빴다. 급히 돌아서려던 찰나 손아래 동서가 나를 불러세웠다.

"형님, 얼굴이 왜 이래요? 살이 너무 빠졌어요."

"아하, 아마 파마를 할 때가 되었는데 하지 않아서 그러나 보다. 곧 할 거야. 그럼 괜찮아 보일 거야."

"형님, 이제 머리 좀 짜르지 그래요? 그 나이에 무슨, 그렇게 긴 머리를. 어디 봐요. 형님 나이에 그렇게나 치렁치렁 긴 머리를 하고 다니는 이 있나."

바로 위 문장은 사실 내 생각이었다. 동서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이 이 경우에도 어울릴까. 곧 파마하겠다는 답에 뜨악한 눈빛으로, 깜짝 놀란 듯한 황당함을 담은 눈으로 나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동서의 눈. 너무 매서워 나는 위 문장을 동서가 꼭 말하고 싶은데도 참고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분명 하고 싶었을 거다.

 

나는 이미 몸과 마음 꽤 곤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긴 머리이다. 그 다다음 주에 치렀던 한양행은 손위 언니네 나이 꽉 찬 40세 조카의 결혼식이었다. 내 머리카락의 길이에 대해 늘 한 마디씩 하는 언니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애, 너는 왜 그렇게 사니? 옷도 좀 이쁘게 입고 머리카락도 좀 자르고."

등등의 문장을 내놓곤 했던 언니들이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천사표 멋쟁이 둘째 언니는

"애, 너, 머리 좀 한쪽으로 치워."

였으며 큰 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포기했을까. 이렇게나 긴 머리카락인데도 언니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하는 것을 보니 괜찮나 보다 싶었다.

 

 

나의 머리카락 뒷모습은 어떨까? 3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친정 조카 결혼식은 1박 2일로 다녀왔다. 내 긴 머리에 아무 말이 없었던 관계로 당분간 이 상태의 길이를 더 하고 다니려니 했는데 그날 밤 꿈 속 광경이 다음과 같았다.

"애, 한 여자 있었어. 아주 긴 머리 여자야. 머리카락 끝이 발 뒤꿈치에 닿을 만큼 길었어."

손위 언니가 검은 꿈 속에 환한 얼굴을 밝혔다.

"그래서~"

"근데 말야. 머리카락이 참 이뻤나 봐. 한 젊은 총각이 그녀를 좇아 줄곧 따라왔지. 사실 긴 머리 여자는 그 젊은 총각을 의식하지 못했어."

"왜?"

"긴 머리 여자는 이 어린 남자와의 자기 인연은 전혀 있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야."

"그런데?"

"젊은 총각은 사나이 대장부 기필고 맘 당기는 일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덤볐지."

"그리고?"

"열심히 걷고 걸어서 긴 머리 여자 앞에 떡 하니 선 거야."

"엥?"

"뒷모습과 가는 옆모습에 그만 반한 것이지."

"어찌 됨?"

"오, 하나님, 늙은 여자, 지 앞날도 모르네요. 이런 미친. 젊은 총각이 외친 말이었어."

"엥?'

"오, 하나님 이 미친 여인네. 제 배알도 모르남요? 어찌 저리 눈 한 번 까딱 하지 않고 저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세상에나, 세상에나, 뒷모습은 20대인데 앞으로 가 훔쳐보니 아니었어요. 적어도 50대 혹은 60대가 될까요. 늙은 소녀. 늙은 할머니. 이 바쁜 날, 종일 따라다녔어요. 제가 미쳤지요, 미쳤어요."

"그리고~"

"그 여자의 머리카락이 불쌍해요. 정말로 아직 젊고 얼굴도 예쁜 아가씨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 여자 혹시 사기꾼이 아니에요? 이렇게 이어서 젊은이가 말했어."

"엠병~"

한 마디씩 내던지는 문장은 나의 것이었다.

 

나의 불면의 밤은 짧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꼭, 하루 있었던 일 중 한 가지씩은 꿈으로 엮어진다. 눈을 뜨니 자꾸 한쪽으로 머리카락을 옮기라던 둘째 언니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전 시 조카 결혼식에서 내 차림새와 얼굴, 푸석하게 두둥실 내 머리카락을 불쌍히 여겼던 동서의 말과 표정도 떠올랐다. 그 꿈 끝 새벽에 눈을 떠서 출근 준비를 하면서 내 머리카락들에게 외쳤다.

"미안. 어떡하냐. 미치지도 않았고 제 정신도 맞지만 쬐끔 제멋대로 사는 여자, 한 여자 있어 이 나이 먹도록 이리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으니. 나, 긴 머리 늙은 소녀란다. 미안!"

지금껏 나는 여전히 긴 머리이다. 아직 파마도 다시 하지 않았다. 올해들어 딱 한 번 파마를 한 듯 싶다. 한 달 여 이 길고 더부룩한 머리카락을 더 짊어지고 다닐 참이다. 나는 미장원에 앉아있는 시간을 견디기가 참 힘들다. 고통이다.

 

나의 머리카락 뒷모습은 어떨까? 4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왜 사람들은 여자 나이 깊어지면 꼭 머리카락을 짧게 하고 다녀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다 된 나이에도 인내심과 충성심과 철벽성을 가미하여 긴 머리를 유지하겠다는데 뭔 문제인가. 퇴근 후 머리를 감으려 준비하는데 갑자기 지난 여름 이 긴 머리를 안고 두 개의 결혼식에 참여하는 것은 꽤 괜찮았다는 결론을 미리 만들어 놓고 글을 쓴다. 새삼 떠오르는 하룻밤 꿈과 함께. 긴 머리, 이미 얇아진 머리카락이지만 보슬보슬해진 촉감까지 사랑하고 있는 늙은 주인 여자가 시대 저항(?) 정신을 발휘하여 글을 쓴다. 

 

'늙은 여자, 긴 머리 좀 했다소니 뭐 어떻소?'

 

하, 어쨌든 하루 한양 왕복은 쉽지 않더군. 다행히 버스는 프리미엄 급이었다 .아, 아니 기차를 탔던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