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랑이 왔다.
요 며칠, 일출 시각이 급격히 늦어지면서 몸은 난방이 된 실내에 푹 젖었다. 이른 출근으로 하루 한 편 일기 혹은 주제 있는 글쓰기를 하리라 했던 다짐이 살살 사그라지려 하고 있다. 이쯤 되는 날이면 온 세상 사람들이 따뜻한 기운 찾아 사는 것, 당연히 이해해 줄 것이라고 단정한다. 안온함에 푹 취하여 이불속에 무작정 머무르는 것에 맛 들여져 가고 있다. 열을 세고 백을 세면서도 바닥에 몸을 눕히고 있다. 세상 사는 일에 이미 능구렁이가 되었지만 더 늦기 전에 뭔가 어떤 일 한 가지라도 진득하게, 해내자던 소망이 흐려지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이곳 일터로 옮긴 후 처음인 듯싶다. 늦었다. 오늘 아침은 많이 늦었다. '많이'라는 낱말 앞에 '아주'를 미리 추가하여 부산스러운 문장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늦잠을 잤다. 어제 같으면 일터에 도착하여 아침 일기를 거의 다 써냈을 시각인데 그제서야 이불속에서 일어섰다.
눈 뜸과 동시에 거실 밖을 내다봤다가 환하게 밝아진 것에 깜짝 놀랐다. 폰을 보니 일터에 있을 시각. 그제야 출근 시각이 지났다고 일어나라는 전화가 왔다. 왕 짜증을 냈다. 왜 이제야 깨우느냐고. 구시렁거리는데 각자 생활을 철저하게 자립하여 사는 관계로 전혀 놀라는 기색이나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이 전화를 끊었다. 늘 6시 30분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서 깨워달라는 부탁을 해 왔는데 이미 일어나 자기 할 일을 하면서도 나를 내버려 뒀다. 그저 부탁에 불과할 뿐 사람은 각자 사는 것이니라. 같이 사는 이의 생각이다. 지당하다.
열나게 달렸다. 출근길 코스를 어제와 다르게 택했다. 가장 짧은 1코스, 중거리 2코스, 중장거리 3코스, 장거리 4코스 중 중장거리 3코스로 달렸다. 한 단계를 낮췄다. 어제 같으면 20분에 갈 거리를 오늘은 15분에 갈 수 있는 거리를 골랐다.
벌써 사람들은 바빴다. 그들은 이미 하루를 꿋꿋하게 곧추세워 이끌어가고 있었다. 짱짱하게 하루를 보내려는 투지와 의지로 달음박질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평소 출근길에 못 보던 사람들이었다. 처음 만나네요. 오늘 하루도 안녕하시라고 무언의 인사를 남기면서 그들 곁을 잽싸게 지나쳤다.
간밤 마음이 우선 편했으리라. 내사랑이 와 있다. 지난달 군부대를 옮긴 후 바쁘게 움직여 자리 잡기를 끝냈단다. 휴가가 주어졌단다. 여름휴가는 여행을 택하더니 겨울 휴가는 집으로 왔다. 고맙다. 귀향을 알려온 그날부터 2주일째 우리는 계획을 짜느라 바빴다. 몇 박 며칠을 머무르는가. 2박 3일이란다. 매 끼니 무엇을 먹일까. 첫 1박은 친구의 초대를 받았노라고 했다. 첫날 저녁 식사를 친구네에서 할 것이란다. 서운하지만 그러느냐고 말끝을 흐렸다.
아이 마중을 나가 집에 내려놓고는 모임이 있다고 집을 나서는 이를 붙잡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가 아니니 당연히 지인들과의 저녁 만남을 무찌르지 않았겠지. 나 혼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집에 온 아이를 두고 혼자 먹는 저녁이 낯설었다. 약속 시간이 되어 친구네를 가겠다는 아이를 붙잡았다. 저녁 식사를 막 마쳤으니 운동을 할 겸 같이 나가겠노라고, 몇 걸음이라도 함께 하고 싶어 내사랑과 함께 집을 나섰다. 고향이 낯선 내사랑에게 새로 생긴 마트에 들어가 친구네에 가지고 갈 선물은 들려줬다.
그다지 가깝지는 않으나 어쨌든 집 근처에 있는 아파트여서 다행이었다. 친구네로 가는 길 안내를 고집하며 좀 더 길게 동행을 고집했다. 내사랑은 내게 한사코 집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잘 모르잖아. 지난해에야 입주한 아파트야. 처음 보는 아파트일 거야. 엄마도 아직 가본 적이 없어. 길 안내는 정확히 할 수 있으니 함께 갈게. 제법 멀어. 내가 함께 가줄게. 갔다가 너 들여보내고 엄마는 운동 삼아 걸어 돌아오면 돼."
"집으로 어서 돌아 들어가세요. 추운데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저, 유럽도 혼자 다닌 사람이어요. 얼른 집으로 가세요."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밤이 점차 가라앉아 가고 사람들이 곧 드러누워 하루를 정산할 시각이었다.
'이 밤에 무슨 친구 집이야?'
눈 뜬 저녁이 길었다. 아이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너무 늦어서 걱정했다."
"그래서 12시 전에 들어오려고 애썼어요. 이렇게 돌아왔잖아요."
자정 3분 전이었다.
씻고, 머리 감고, 머리 말리고, 마침내 잠자리에 드는 내사랑을 확인하고 나니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보고 있던 영화를 마저 보고 나니 새벽 두 시를 조금 넘었다. 난방을 끄지 않고 잤다. 밤새 온 집안이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온몸이 노글노글 유해졌겠지. 푹 잠들었나 보다. 마음이 편했나 보다.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줄곧 잤다.
'오늘이 토요일인가? 아냐, 내사랑이 와 있을 뿐. 오늘 나는 출근해야 한다.'
잠 중에도 이미 아침임을 깨달았나 보다. 스스로 세운 규칙을 지키지 않았음에도 그리 서운하지 않았다. 건넌방에 내사랑이 자고 있다. 재빨리 차려입고 출근했다.
아침은 감자 된장국 등 어제저녁에 이미 안내해뒀다. 낮은 사우나를 다녀오는 길에 간단한 식사를 하겠다고 했다. 저녁 식사를 어떻게 할까. 아귀탕을 먹을까? 소고기는 너무 먹어서 싫단다. 서대회를 먹일까. 삼합 홍어도 먹고 싶다고 했는데. 어떤 음식을 먹을까. 생물을 사 와서 집에서 해 먹일까. 우선 입맛 행복하게 하는 식당 찬에 밥을 먹일까. 퇴근 후 집에서 요리하기에는 벅찰 것이다. 물론 옛날 같으면 매 끼니 식사 계획을 세워 먹였겠지. 시간표를 작성하여 챙겨 먹였던 육아 열정이 떠올랐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일주일의 휴가 기간 중 단 2박 3일만 있다가 간다. 너무 일찍 고향을 떠나 친구들이 없다. 안타깝다. 축구를 하러, 야구를 하러 대학시절 살던 곳으로 가겠단다. 주말을 포함한 남은 휴가를 그곳에서 보내겠단다. 군 제대만 하면 꼭 아이 자리 잡은 곳으로 내 거처를 옮기리라고 다짐한다. 글쎄 내 뜻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온몸이, 온 정신이 개운하다. 참 잘 잔 밤이었다. 고마운 내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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