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개성은 시대의 흐름을 타지 않는다.
그래, 내 개성은 시대를 겁내지 않는다. 내 멋대로 산다. 내 마음 가는 대로 날아다닌다. 굳이 찌질이가 될 필요가 없어서 사람들의 눈도 내게 오도록 유도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늘 '침잠'의 순간을 반복해 쌓아 가면서 생을 진행한다. 나. 그러므로 철저하게 개성을 산다. 세상의 흐름을 타지 않는 '고요'를 산다.
신의 세계에서도 내 개성은 감히 건들지 못할 것이다. 내가 가끔 나를 다독이면서 내뱉는 문장이다. 누구도 나를 범하지 말라. 아니다 이 정도까지는 가지 않는다. 왜? 나는 그저 서민이니까. 공식적인 행사에 나가 우쭐대거나 드러내야 하는 특별한 인간이 아니므로. 그러므로 신은 내게 눈도 두지 않는다. 신은 물론 미지항 속을 드나드는, 그가, 혹은 그녀가 나를 감히 집적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도 내 개성이니까. 내 맘대로의 생각이다.
그럼,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음? 아니다. 내 생 곳곳, 가끔 신과의 교유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내 젊음의 색깔이 너무 새파란 것에 질투가 난 조물주가 어느 산사 드라이브 코스에서 차 그대로 낭떠러지로 밀어뜨려서 일어난 교통사고 후에 반 년을, 매일 아침 나는 신을 불렀다. 거칠게 호령했다.
"나, 눈 좀 뜨지 않게 해 줘. 나, 새날을 좀 맞이하지 않게 해 줘."
조물주, 어쩌면 신일 수도 있는 이와 통속적인 교류를 하고 살던 나는 또 다른 상태의 한 물체로 새롭게 창조된 셈이었지.
"너를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한 것 역시 조물주의 질투이리라. 그래, 너, 이대로 살아 봐. 살고 싶지 않다고 하니 살려줄거야, 살아 봐. 이대로 살아 봐."
어릴 적 뒷마을 가는 길에 있던 제법 큰 절의 스님이 늘 우리집에 동냥을 오셨다. 참 '동냥'이라는 말 오랜만이다. 지금 이 문맥에 맞는 낱말일까? 찾아보자. 맞다. 흔히 거지나 동냥아치가 돈이나 먹을 것을 얻으러 다니는 것을 동냥으로 알고 있는데 본디 '동냥'의 어원은 '동령動鈴'이라는, 한자 말이다. 원래 불가(절, 사찰)에서 법요(法要)를 행할 때 놋쇠로 만든 방울인 요령을 흔드는데 이것을 동령(動鈴)이라고 한 것에서 출발했다.
중(스님 - 나는 스님보다 '중'이 더 정스럽다. 어릴 적 언어 습관에 의해서. 이럴 때 언어의 비하~ 블라블라는 영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에 대해서도 언제 한 편의 글을 써보고 싶다.)이 쌀 같은 것을 얻으려고 이 집 저 집 돌아다닌다. 중은 중생의 집 어느 문전에서 방울을 흔들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방울 대신 목탁을 두드린다. 동냥이라는 말은 이렇듯 중이 집집마다 곡식을 얻으러 다니던 데서 시작된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사용하는 '동냥'은 맞다.
다시 문단을 시작한다. 어릴 적 우리 엄마가 다니던 마을 뒤 큰 절의 스님이 계셨다. 어느 날, 나 혼자서 마루에 나와 눈곱을 떼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스님은 드르륵 문을 열고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 아래까지 대뜸 걸어들어오시더니 신을 벗어 얹어두는 댓돌 앞에 턱 섰다. 목탁 몇 구절을 두드리더니 아무 반응이 없자 나를 지그시 바라보셨다. 목탁 울림이 빠르고 강해졌다. 이어 말씀하셨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씀하셨다. '팔자가~'로 시작된 문장 엮임이었다. 무슨 말이었냐고? 이 역시 다음에 한 편의 글로 완성하기로 하고. 어쨌든 나는 이후 내 팔자 그대로 살지 않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가끔은 스님의 말씀을 곱씹으면서 세상을 살았다는 거다.
긴 생을 살면서 한두 번이었으랴. 하여 내가 내린 결론으로 나는 어느 곳에나 간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성당을 만나면 성모 마리아 님께 인사를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산사를 가면 대웅전의 열린 문 아래 댓돌 앞에 서서 어릴 적 내게 일침을 주셨던 큰 스님처럼 합장한다. 우리 집 뒷산을 가끔 밤에 오르는데 나는 함께 오른 남자에게 들키지 않게 곳곳에 붉은 불을 내뿜고 있는 십자가를 향해 기도한다. 뭐라고? 무슨 내용의 기도냐고? 그냥 아프지 않고 잘 살게 해달라고. 내 남자 지금처럼 예상 수명 120 말고 100살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내사랑, 지금 군에 있는 내 새끼, 지금처럼 군대생활을 즐겁고 신나게 하게 해달라고.
참 내, '개성' 운운하다가 웬 종교? 어쨌든 나는 이렇게 모순을 산다. 모순마저 나의 짙은 개성이다. 내 개성은 이렇듯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구속당하지 않고 내 멋대로 사는 것이다. '종교'를 향한 나의 행동거지며 내가 사용하는 언어며 내가 품고 있는 심정을 내놓으면서 나의 개성시대를 마친다. 묘한 글이 됐음을 시인한다. 어쩌랴. 마구 글을 쓰는 것 또한 나의 개성인 것을. 진지하게 내 블로그를 방문할 수 있는 독자가 있을 수 있음에도 굳이 충족시키는 글을 쓰기 위해 애써 기를 쓰지 않는 것 또한 그렇고. 그저 그만그만한 것이 나의 글 쓰는 능력임에 어쩔 수 없는 것도 개성인 것이고!
자,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 왜? 내 맘대로이니까. 순간을 단위로 온갖 정서를 드러내는 내게 어느 것, 어느 사람, 어느 신의 손도 타지 못할 개성이 있다는 것. 이 얼마나 행복 충만한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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