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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내 탐욕 덩어리의 실체를 '고해'의 제단 위에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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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탐욕 덩어리의 실체를 '고해'의 제단 위에 올리다.

 

 

아침 하늘이 무채색 불투명이었다. 하늘 아래 미물은 움츠러든 채 우주를 걸음하였다.

 

 

아침이 어둡다. 내일 아침도 오늘처럼 어둡기를 바란다. 주말 아침. 평일, 마음 한 구석에 상주해 있는 '출근 긴장감'을 내려놓으면 제법 늦은 아침까지 잠을 잘 수 있어서이다. 수시로 눈을 떠서 이미 와 있는 아침을 노려보는 내 내면의 욕심덩이 세포가 또 다른 긴장의 눈으로 늘어져 있는 육신을 나무라겠지만. 이름붙일 수 없는 기하학적인 조각잠일지라도 누리고 싶다. 출근하지 않는 날의 늦잠은 순간의 사탕발림 의식을 치르게 할 수 있는 가벼운 생의 한 장면이되 순간이라도 '영속'을 꿈꿀 수 있는 생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평생 불면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미술사학자 양정무 선생님의 유튜브 강의를 듣고 있다. ('미술을 읽어드립니다')  '고야'를 강의하신다. 나 그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인데 그의 전기를 다룬 영화 몇 장면만 떠오를 뿐 그다지 그의 작품들마저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이 없다. 말하자면 '그림 읽기'에 내 온 생을 바칠 듯이 공부했던 날들이 통째 증발해 버렸다. 안타깝다. 인간은 '건망증'이라는 것이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행복'이라는 낱말도 '건망증'과의 동행으로 존재 가능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노쇠해 가는 내 생의 연보를 점검할라 치면 '건망증'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 아림이 심하고 혹 '이른 치매'가 아닌가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언젠가 오른 적이 있는 산 정상이 제 스스로 거리를 길레 늘린다.

 

 

어쩌자고 진정 '건망증'이 발동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 일들은 계속 뇌리 속 단단한 방을 만들어 들어앉은 것일까. 어제 오후, 내 일터 업의무 일년 행사 중 단 한번 있는 '공식적인 행사'를 돌아보는 일기 속에 '나도, 함께했던 22.내사람들도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었노라'고 회상했는데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떠오르는 것은 어제 저질렀던 내 '실수'였다. 우리들을 실검하기 위해 등장했던 사람들이 한 시간 내내 보내오던 강력한 눈초리의 예리함에는 미리 저장해 온 '두고 보자'식의 무서움이 있었다. 이 눈초리마저 오늘 아침 새삼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어제는 '그러려니' 했던 모습으로 가볍게 지나치자 했는데 말이다. 

 

'실수'는 결국 '탐욕'이다. 더 많이 들려주고 더 많이 보여주고 더 많이 느끼게끔 기어코 해내겠다는 욕심. 어제 행사의 100퍼센트 중 6,70퍼센트는 그저 '예측'에 불과한 돌발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간의 일인데, 삼십 여 명 가까운 사람들이 내놓을 돌출을 쉽사리 다독거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를 향해 각자의 원근법으로  강렬하게 주시해오는 눈빛들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반사시키기 위해서라도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욕심 내려놓기'였는데. 잘 알고 있다. 너무 잘 알고 있어 이런 행사가 시작되면 바로 떠올리는 명제가 '그 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의 양을 줄이자, 욕심을 내려놓자.'이다. 그리고 주위 동료들과 함께 이런 류의 행사에 대한 계획을 마련할 때면 내가 강력하게 내세운 주제이기도 하다. 

 

여기 저기 무채색이 펼쳐진 아침

 

 

어느 일인들 앞으로 일어날 일을 틀림없이 예측해낼 수 있으랴마는 특이 어제 치렀던 행사는 더욱 그렇다. 이렇듯 빤히 알면서도 나는 또 '반복'하고 말았다. 무슨 설레발인지 어제 아침 나는 물걸레를 들고 나댔을까. 내 공간을 넘어 옆 동료들의 공간까지, 나와 동료들이 함께 운영하는 공간까지 열심히 쓸고 닦았다. 불필요한 일이었다. 결코 어제 아침에 할 일이 아니었다. 일의 앞뒤, 일처리의 급박한 정도, 일의 중요도 등을 가려 움직이는 '판단력'을 제대로 작동시키질 않았다. 곧 치를 '공식행사'를 위한 준비에 뇌세포들울 활동하게 했어야 했다. 

 

'양'의 조절이 필요했다. '양'의 과감한 축소가 필요했다. 둘을 보여주려 수선 떨 일이 아니라 하나를 제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했다. 결단이 필요했는데 어영부영 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행사 준비를 위한 진정한 고뇌의 시간을 확보하지 않았다. 이도저도 아닌 식이 되어버렸다. 이것도 보여주고 저것도 보여주고 말겠다는 '탐욕'은 행사가 끝난 후 되돌아본 결과 꼭 써야 할 문장 하나를 빼먹은 것으로 확실하게 드러났다. 그도 '그럴 수 있으려니~', '예상치 않았던 돌출이 여럿 발생한 것을 확인하였으므로 이 또한 너그러이 이해해 주리라.'하고 생각했던 어제 오후의 '돌아보기'는 오늘 아침 바뀐 생각으로 나를 사로잡는다. 눈뜨고 회상한 '어제'가 새삼 후회스러운 것도 문제이다. 왜 한번 '그러려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늘 아침에는 달리 느껴지는지. 

 

인간사. 참 고루고루 하는구나 싶은지 이 아침의 고요 속 어두움은 더 짙은 불투명의 농도로 내 육신 아래쪽에 가라앉아 있다. 농염한 자태를 드러내어 나의 '탐욕'을 꾸짖고 있다. 어두움은 내 '고해'를 위한 제단으로 마련된 셈. 물론 이 모든 생각은 또, 곧 이어질 오늘의 여러 돌출들로 인해 서서히 옅어지게 될 것이다. 다시 또 '그러려니'의 낱말이 힘을 되살리고 서너 날 후에는 거침없이 어제 실수를 '건망증' 속에 묻히게 할 것이다. 더불어 생의 가벼움을 만끽하게 되리라.

 

다만 일터 현관 앞 베고니아는 제 생을 붉게 즐기고 있었다.

 

 

이런 날은 폰 필름에 담을 수 있는 장면이 참 많다. 내 몸뚱이보다 더 큰 부피의 펼침이 가능한 우산을 들고서도 여러 풍경을 담아왔다. 이처럼 어두운 장면들을 나는 어쩌자고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 '밝고 맑음'을 의도적으로라도 즐길 때 생도 밝아진다는 충고들이 커다란 박스에 담겨 나를 짓누른다.

 

풍경으로만 사랑하자. 오늘, 저 풍경 속 어두움이 지닌 난해한 철학일랑 버리자. 가벼이, 가볍게 하루를 즐길 것. 

 

 

 

무채색 불투명 하늘 아래 한 인간의 심사도 이리 얽혀 있었으니~

 

 

 


아침에 써 둔 아침 일기를 결국 퇴근 시간 이후에야 올린다. 

날마다 바쁘다.

하긴 날마다 바빠 다행인지도 모른다.

'바쁨'으로 연결되는 일상이 있어 어설프지만 '끈'은 계속 이어진다. 질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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