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맑은 아침. 장마라는데 대기에서 내게 오는 기운이 그리 습하지 않다. 이유가 있다. 차라리 개운한 편이었다. 왜?
장마라고 해서, 비 왕창 내리퍼붓는 장마래서 운동복 바지에 가벼운 반 팔 면티를 입고 출근길을 나섰다. 밤새 모든 문을 꼭꼭 여닫고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에어컨이나 제습기를 가동하지 않았는데도 몸이 개운하다. 다행이다. 세 개나 되는 제습기를 가동하지 않은 채 어제 종일 실내 생활을 했다. 부디 올 장마는 제습기를 가동하지 않고. 에어컨도 작동시키지 않은 채 장마가 지나갔으면 싶다. 문 꼭꼭 닫아야지. 화초에게는 미안하지만.
밤에 비가 내렸나 보다. '태어난 김에 세계 일주 2'의 재방송을 보느라 새날 두 시가 넘어서야 잠에 들었다.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가 내린 흔적이 있다. 그냥저냥 내리다 말다 했나 보다. 베란다 밖 안전장치로 설치되어 있는 철봉에 빗방울이 방울방울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또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나 보다. 옷차림이 가벼우니 출근 준비 시간이 절약되어 몸도 마음도 경쾌했다. 사람 기운이 아직 시작되지 않는 거리를 걷는 기분이 참 깨끗했다. 내리는 비가 차지한 우주의 기운과 달리 사람의 마음이 맑으니 오늘은 그것으로 됐다.
일곱 시가 채 되질 않아 출근길의 거리를 늘여서 길을 걸었다. 오늘 아침에는 들를 곳이 있다. 마트 비슷한 가게이다. 아니 무슨 마트? 글쎄. 가게 이름을 모르겠다. 아무튼 마트 비슷한 조그마한 가게가 출근길에 있다. 그곳을 들러야 한다.
지난주 금요일이다. 그날 일터에 음료수를 사 가야 했다. 일터까지 다니는 길을 떠올려보니 마땅한 가게가 없다. 장거리 출근길 3호로 지정해 놓은 꽤 시간이 걸리는 코스를 가면 대로 옆 인도를 걷게 된다. 그 길에는 가게들이 있다. 머릿속에 있던 가게 한 곳이 눈에 보였다. 찾아 들어갔다. 음료수만 사려고 하니 함께 먹을 빵이나 크래커 종류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정'이 담긴 초코파이를 골랐다. 일터 인원을 생각하니 넉넉하게 준비해야겠다 싶어 음료수도 넉넉하게 담았다.
낑낑거리면서 계산대로 왔다. 무게가 문제였다. 배달되지 않는 가게였다. 나는 걸어서 출근 중이었다. 음료수를 들고 일터까지 가기에는 내 몸이 너무 가냘팠다. 머뭇거렸다.
"배달이 되지 않겠지요?"
"예. 어디까지 가시는 거죠?"
"저 위, 그곳이요."
"어이쿠. 안 됩니다. 이 무거운 것을 들고 어떻게 저곳까지 간답니까. 초코파이만 가져가세요."
순간 다행이다 싶었다. 겁 없이 바구니에 담아 온 음료수를 들어보니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던 참이었다.
생면부지. 처음 본 사람이 꾸리고 있는, 처음 들어와 본 가게에서 이렇게 계획 없이 장바구니에 담다니 이게 뭔 일인가. 계산을 하려고 계산대에 올리려던 순간 이게 아니다 싶었다. 너무 무거웠다.
"아, 죄송합니다. 다음에 사 갈게요. 이것들을 있던 곳에 넣어두고 올게요. 초코파이만 계산하십시오."
"아, 아니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두고 가세요. 이걸 모두 가지고 간대서 무척 걱정하고 있었어요. 너무 무거워요. 다음에 차 가져오면 사가세요."
대여섯 번을 머리 숙여 감사와 죄송하다는 마음을 실어 인사를 드리고 가게를 도망치듯 나왔다. 부끄러웠다.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더군다나 이른 아침 첫 손님일 텐데 말이다. 나는 어쩌자고 앞뒤 생각하지 않고 일을 저지르는가. 연신 고개를 푹 숙이면서 죄송해하는 나에게 아주머니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걱정말아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이런 일도 있지요. 물건 다시 전시하는 것이야 제가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라고 제가 이 가게에 있지요."
주말을 집에 있는데 자꾸 그 가게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월요일 아침에 들러 꼭 뭔가 하나 사야겠다. 고마우신 아주머니.'
오늘이 월요일이다. 가게로 가는 내내 무엇을 살까 고민하였다. 초콜릿을 샀다. 가게에 있는 초콜릿 치고 그럴싸한 포장이 참 예쁜 상자까지 고급지다. 값이 꽤 나간다. 가벼운 것이어서 무려 다섯 봉을 샀다. 맛도 있을 것 같았다. 마스크를 하지 않은 오늘 내 모습에도 곧 떠올리셨다. 뭘, 그런 일을 가지고 그러느냐고 뒤로 물러나셨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이런 사람이 아직 있구나 싶어 마음 따뜻해지는 여름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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