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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내 어머니의 언어

보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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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타지다.

 

보타지다로 검색한 결과 사진을 찾을 수 없어 '앙상하다'로 했더니 이 사진이 나왔다. 뼈만 남은 자작나무인 듯싶다. 앙상한 상태와 보타진 상태는 상당히 유사하지 않은가.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내 어머니는 늘 보타졌다.

 

아들 넷, 딸 넷의 여덟 자식에 두 살에 만난 막동이 시동생에 열살 안팎 남여 시동생 둘까지 셋을 길러서 혼인까지 시키셨던 삶의 내 어머니. 평생 사람 길러 사람 만드는 일로 사신 내 어머니는 늘 보타지셔야만 했다.

"아이구머니나. 왜 이 일이 이리 됐다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는 어쩐다냐."

"저렇게도 험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겄냐. 이것을 어찌할 거나. 꿈에 생각 못했다야."

"아이, 이것 이렇게 하면 제대로 되겄냐?"

"그것, 그렇게 해서는 안 돼야. 이리저리 손 좀 봐야지. 저렇게 놔두면 어찌 되겄냐?"

"어찌해서 좀 만사형통하면 얼마나 좋을까이."

좌불안석 속에 매일, 매 순간 릴레이로 이어지는 무수한 일들. 옆에서 보는 어린 나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보타지다'는 '밭다'의 남도 방언이다. 바싹 마른 상태를 말한다. 밭아 [바타] 밭으니 [바트니] 밭는 [반는]으로 활용된다. 흔들면 출렁출렁한 액체가 어떤 힘으로 인해 바싹 졸아서 말라붙은 상태를 말한다. 더는 자기 존재를 흔들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해, 가뭄이 심하게 들었지. 밑바닥을 간신히 채우고 있던 샘물이 밭아 버렸어. 온 마을이 어찌 물을 대서 농사를 좀 지어보려고 발버둥쳤지만 방법이 없었어. 그해 겨울에는 물배로 살았지야."

 

'밭다'를 인간의 신체에 적용해 보자. 몸에 심하게 살이 빠져서 바싹 여윈 상태를 뜻한다. 뼈다귀만 남은 상태에 가까운 것을 말한다. 나는 그렇게, 뼈만 남은 상태로 있다가 죽어가는 이를 본 적이 있다. 뼈만 만져지던 상태로 살다가 간 사람.

"그녀는 몇 년 암으로 투병 생활을 했다. 살이 빠져서 온몸이 바싹 여위었다. 살이 바튼 그녀는 손 까딱할 힘이 없었어. 가까스로 입에 두세 번 시금치 나물을 한 가닥씩 집어 넣더니 곧  젓가락을 놓았어. 젓가락 두 가닥을 들 힘도 없는 듯싶었어."

 

사람의 마음 상태에도 '밭다'를 적용해 본다.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몹시 안타까워 조마조마한 상태에 이르는 것.

"집을 나간 아들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아저씨는 창자가 밭고 위가 타는 듯하다고 말씀하셨다. 흙바닥에 둥근 원이 크게 드려질 만큼 커다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셨다."

 

우리 엄마도 그랬다. 늘 온몸과 마음이 저리고 마르고 탔다. 보타지셨다. 보타지다가 그만 도무지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힘에 부치면 그 신호가 입술에 우선 왔다. 엄마의 입술은 늘 보타졌다. 입술이 쥐고 갈라져서 어떤 때에는 아랫입술에서 핏물이 떨어지기도 했다.

 

요즈음, 내가 보타지고 있다. 우리 엄마만 하겠는가만 올해 들어 처음 맡게 된 일이 보통 일이 아니다. 끝없이 오류를 생산한다. 늘 장애에 부딪힌다. 문득 내 전생에 지은 죄가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나 힘이 들까 할 정도이다. 특히 돈이 연결될 일인지라 혹 문제가 생기지나 않을까 봐 바싹바싹 입이 탄다.

 

이주일 여 아랫입술이 바싹 마르더니 결국 쥐고 말았다. 입술이 쥔다고 하지. 보타진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어서 일어나자고 나를 다그친다. 정신을 차리자고 나를 다독거린다. 뭔들 쉬운 일이 있겠는가. 이겨내자. 죽지 않으면 살아나리라. 곧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오리라. 늘 붉으죽죽한 끄텅거리를 이고 와서 앞을 막던 것도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리라. 모든 것이 정상궤도 위에 우뚝 서서 올바른 순환의 길을 작동시키리라. 오늘은 어서 자자. 봄비에서 여름의 냄새가 날 만큼 기골이 장대한 빗줄기가 탄생했다. 오전에 내린 비는 금방 커다란 양동이를 가득 채울 만큼 빗방울이 굵었다. 아침 출근길을 그 빗속에 밤새 크고 예쁜 눈을 뜬 철쭉들이 반겨줬다. 빨강, 분홍, 주황에 흰색까지 철쭉 잔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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