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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곳곳에서 호흡하고 있다.
며칠 전 일터 화단에서 만난 '작약'
내 아버지를 떠올린다.
내 아버지가 장독대와 담 사이 가늘고 긴 화단에 심어 가꾸셨던,
작약!
아마릴리스!
맞을까? 맞을 거야. 나도 키우고 있는 화초.
거대한 분에서 조그마한 분으로 옮겨 심었다. 아직 꽃이 없다. 대신 일터에서 꽃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우리 집 아마릴리스는 분갈이의 힘을 견디지 못해 꽃을 만들지 못한 것일까.
패랭이꽃! 작은 몸들 모여 찬란해졌다. 패랭이꽃! 일터 대형 화단에 무리 지어 피었다. 꽃잎들 가상에 자리한, 얕게 갈라진 여러 갈래 그 계곡에 사시사철 꽃을 피울 힘이 모여있는 것일까.
팬지
사람들에게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는 팬지. 8월쯤 되면 고개를 떨구는 팬지의 모습이 꼭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을 연상케 했단다. 이 때문에 '팬지'라는 이름은 “생각(thought)”을 뜻하는 프랑스어 pensée에서 꽃 이름을 가져왔다고 한다. 강준만 선생님의 '인문학은 언어에서 태어났다'라는 글에서 읽은 것이 기억난다. ‘3월의 꽃’ 팬지는 ‘자유사상’의 상징이 되었는가?에서 자세하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다음을 인용하셨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햄릿(Hamlet)』(1601) 에서 오필리아(Ophelia)는 이렇게 말한다. “There’s pansies, that’s for thoughts.”
나는 자줏빛 남색을 가득 지닌 '팬지'의 남보라색을 참 좋아한다.
동백
일터 정원에 동백 몇 그루가 있다. 겨울 내내 피어있던 붉은 동백. 여전히 피어있는 꽃 몇 송이가 참 대견하다. 하늘을 향해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동백!
장미, 연분홍꽃 장미.
나는 장미를 무지 좋아한다. 흑장미가 좋다. 내 집에도 내 아이의 나이만큼 나와 함께 살아온 장미가 자라고 있다. 그중 한 분은 흑장미이다. 일터 장미들은 울긋불긋 꽤 가벼운 느낌을 색을 지녔다. 예전 같으면 나는 연약한 색깔의 장미에게는 눈빛 한 번 주지 않겠지만 지금은 연분홍이건 검붉은 것이건 모두 좋다. 다 이쁘다.
이름을 모르는 꽃
지난주 토요일, 낙지를 가지러 갔던 아파트에서 봤다. 자그마한 화단에서 거대한 힘을 지니고서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보라색 꽃이 내게 키우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했다. 참았다. 더는 안 된다. 살림을 줄여야 한다. 멈추자. 화초의 양을 늘리는 것은 그만! 어쨌든 옅은 보랏빛 꽃들이 참 예뻤다.
제라늄. 우리 집 꽃!
빛깔이 참 이쁘다. 올 봄에는 제라늄도 몇 분갈이를 했다. 그중 최근 핀 제라늄! 이름은 모른다. 제법 키우고 쉬운, 흔한 쪽에 속한, 그런 제라늄이다. 그래도 좋다. 참 고운 색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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