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퍼부은 거다.
출근길. 다섯 시 삼십 분에 시작한 출근 준비였는데 정작 출발은 여섯 시에 기상한 때보다 더 늦은 출발이었다. 일곱 시를 넘어섰고 십오 분이나 지난 시각. 아마 올 들어 최고 늦은 시각의 출발이었으리라. 뭘 했냐고? 삼십 분을? 남자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어젯밤부터 좀 어서 점검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새벽 다섯 시 삼십 분쯤, 눈을 뜨고서도 시작하지 않더라니.
그래, 어서 좀 점검해 달라고 다그치다가, 그러다가, 점검을 시작한 남자가 또 토를 단 것이 여럿. 속으로는 그랬다.
'젠장, 어젯밤부터 어떤 내용을 좀 살펴달랬더니 이제야 시작하면서 뭔 말이 저리 많음? 저 남자는 왜 내가 좀 뭘 봐달라고 하면 저리도 잘난 척을 하지? 대개 짜증나네. '
그래, 왕 짜증스러웠다. 걸치고 있던 출근복까지 교체해야 했다. 편한 옷을 걸치고 나가려는 생각으로 바지를 입으려고 했는데 오늘처럼 습기 꽉 찬 날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남자의 까탈스러움에 한두 번 그의 책상 앞으로 불려 갔다가 오고 옷을 한 번 입었다가 다시 벗고 다른 옷을 입었더니 총 삼십여 분. 결국 집을 나선 시각은 생각보다 너무 늦어 마음이 바빠지게 했다. 어젯밤 잠들면서 생각은 오늘은 적어도 여섯 시 삼십 분에 출발하여 일곱 시 십 분 전에는 일터 내 방에서 일을 시작하려니 했다. 아니 아침 일기를 시작하려니 했다. 적어도 일곱 시 삼십 분에는 아침 일기를 마치고 업무를 좀 시작하려니 했다. 꿈은 사라지고 오늘 아침 출근길에서 멋들어진 글감이 있었는데도 이곳 블로그 창을 열지 못한 채 하루를 마쳤다. 지금 시각은 오후 아홉 시 십육 분. 아침 일기가 못 되었다.
출근이 늦었다는 생각은 몸을 들뜨게 했다. 바쁜 마음으로 현관 쪽을 향해 걸으면서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보니 십몇 층이었다.
'어라, 그분이나 보다.'
집 안에서 엘리베이터 열림을 누르지 않은 채 현관을 나섰다. 우리 집 9층까지는 십몇 층에서 내려오는 동안 집을 나서서 엘리베이터를 눌러도 충분히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답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분을 만나면 나의 인사말 볼륨이 커진다. 일부러 그렇게 한다.
"예, 안녀어어 어~"
나의 인사말 물음에 대한 그의 답은 항상 온전한 문장이 아니다. 아, 물론 그분의 입 안에서는 문장의 끝이 있었으리니. 늘 그랬다는 것이다.
그는 세속적으로, '~님'이시다. 님. 사회 고위층이시다. 대중이 우러러보는 존재이다. 어떻게? 직이 그렇다. 대중으로부터 '선생님'이라는 칭호로 통용되는 분이시다. 그래서인지 그는 깔끔하다. 의상에서부터 저 아래 구두까지 명품값의 냄새가 좍좍 흐른다. 명품 구매를 전혀 하는 일이 없으니 내가 뭘 알랴마는 느낌이 그렇더라. 명품들로 꾸린 외양.
다시. 여기서부터는 '그'로 정리한다. 왜? 그의 위치를 하강시켰다. 나와 같은 류의 존재로. 왜? 나도 그리 불리니까. 나도 어디 가면 사람들이 내게 그러더라.
"선생니임~"
아침 일찍 아파트 점검을 위해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보셨을 경비 아저씨에게도 내가 그렇게 한다.
"선생님"
심지어 아파트 경비 아저씨는 어디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을 치르셨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그러므로 모두 '그'이면서 모두 '선생님'이다. 나도 '선생님'이자 '그녀'이다. 말하자면 요즘 세상은 모두 '선생님'이다. 모두, 각자, 모두에게 서로서로 선생님이시다.
한데, 그. 그는 도무지 '그'라고도 부르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사실 거의 대부분 만나게 될 때마다 그렇다. 대면에 그는 너무 쌀쌀맞다. 무표정에 따뜻함이라고는 단 한 점도 묻어있지 않은 인사말을 건네 온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식으로. 내가 인사말을 건네지 않으면 절대로 입을 벌리지 않는다. 먼저 인사를 해 온 적이 없다. 대중을 상대로, 최고의 서비스가 필요한 전문직의 직업이라고 들었다. 주차장에는 그의 차가 최고급으로 두 대가 보인다. 돈이 많은 태를 내느라 그러는 것인가. 자기 직위를 은근 슬쩍 내어 보이는 것일까.
직장과 일상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것이 그의 개성이고 특징이고 독창성인가? 나는 어쩌다가 한 번씩 엘리베이터를 그와 동행하게 되면 기분이 영 아니게 된다.
집에 들어와 우리 집 남자에게 외치곤 했다.
"그 남자, 어찌 돈을 벌지? 저따위로 사는데? 왜 인사를 할 줄 몰라. 받는 인사라도 좀 친절하게 하든지."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는 그 특유의 고정된 자세와 눈빛으로, 거의 정지 상태로 사람을 대한다. 아, 대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 취급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느껴졌다.
"저 사람은 왜 이 아파트에서 살까. 그에게는 그와 그의 마누라와 가족들을 빼놓고는 절대로 함께해서는 안 될 사람들인 것 같아. 그런데 어떻게 십 년을 넘게 이곳에 살지? 이제 구식인데 말이야. 어찌 우리 아파트에서 삶? 이사를 좀 갔으면 좋겠어. 그 사람만 보면 기분이 영 아니야. 당신은 내 옆에 서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식으로 엘리베이터에 서 있어. 짜증 나."
나의 투덜거림에 우리 집 남자가 답하곤 했다.
"별 걸 다~. 그 사람 개성이야. 자기 직장에서는 잘하니까 이 세월을 안 잘리고 잘 살지. 직장에서도 저러면 대중들이 그에게 가겠음? 아니지. 그러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 아마 한 마디도 안 하고 싶을 수도 있어. 너무 피곤하나 보다. 그 사람 직장이 종일 사람 붙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잖아. 그것도 이래저래 힘들고 찌든 사람들만 만나는데 오직 힘들지 않겠어? 그런 생각 놔. 그리고, 남의 집 남자에게 무슨 관심이 그리 많음? 그 관심을 나한테 좀 줘봐."
오랜만에, 오늘 엘리베이터에서 그분을 만났다. 다시 그분으로 복귀시킨 이유는 우리 집 남자의 답, 위 내용이 떠올라서였다. 올해 들어 그를 만나기 참 힘들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내가 일찍 출근하면서 출근길에서 그를 만날 일이 없었다. 사람도 사람 나름이라지만 그러나, 사람이 곧 사람이어서인지 은근히 반가웠다. 한 치도 바뀌지 않은 정자세로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었다. 뭐랄까. 아하, 로봇이었다. 틀림없는 로봇이었다, 아니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요즘 로봇은 저러지 아니한다. 요즘 로봇들은 얼마나 애교가 많다고.
"안녕하세요?"
평소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 내는 인사말의 소리보다 몇 데시벨 더 높은음과 소리가 더해진 크기의 인사를 내가 그분에게 건넸다. 내심 뿔이 났다. 무표정하게 정자세로 서 있는 그에게.
'그래, 오늘은 내가 기어코 이분 입에서 한 마디를 더 말씀하시게끔 하고 말 테다. 두 마디는 하게 할 거다.'
예상대로의 목소리였다.
"안녀어어 어 ㅎ~'"
문장의 뒷부분이 추락해 버린 문장이었다.
'으, 여전하시군, 여전해. 많이 못 봤으니, 세월 좀 지났으니 조금은 변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전혀~"
'그래, 남의 집 남자. 무슨 관심이냐? 두 문장? 말도 말아라. 내가 늙어 죽겠다. 안 되겠다. 그냥 가자.'
맘먹는 중인데 벌써 엘리베이터는 1층이었다.
머뭇. 내가 그분과 단둘이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항상 그가 먼저 내렸다. 저 위 층의 그가 먼저 타 있으니 내리기 좋은 곳을 선점해 서 있었고 나는 늘 한쪽으로 몸이 구겨 넣어진 채 그가 먼저 내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내리고, 내가 뒤따라 내리는 식이었다. 내리면, 자동차를 향해서 같은 쪽으로 걸으면서 나는 속으로 그의 뒷머리를 향해서 외치곤 했다.
'잘 가시오, 잘 사시오. 그리 유별나게 굴지 마시오. 당신이 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본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오, 나. 어지간히 거만하게 구시오, 어지간히.'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는데도 그가 움직이지 않았다. 내리지 않았다. 순간 놀란 나는 엉거주춤. 토끼 먼저 거북이 먼저 하는 방식으로 둘이서 뻘쭘, 서 있게 되었는데, 그가 나를 향해 몸을 휙 돌리더니 말한다. 공손하게 두 손을 합장한 채 펼쳐서 내 쪽으로 내보이면서.
"먼저 내리시지요."
나, 인간인 나. 강태공 곧은 낚시질 끝에 대어 만난 듯 재빨리. 그분을 앞질러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나오면서, 밖으로 거의 다 나와서. 뒤따라 나오는 그분 쪽을 향해서 외쳤다.
"즐거운 하루를 만드세요."
세상에나, 세상에나. 내가 블로그 친구들 집을 방문할 때 하는 문장을 내뱉은 것이었으니.
"예.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었던가. 아니다. 그것이 아니고.
"멋진 하루 만드세요."
이었던가. 아, 그것이 아니고,
"고맙습니다."
이었던가.
성공했다. 어쨌든 성공했다. 그것도 두 마디가 아니었다. 그분이 세 마디를 하셨다. 가만 그분이 내놓으시던 문장을 소리를 함께 싸서 되새겨보니 부드러움마저 실려진 듯하였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모두 가진 그분의 입에서 무려 세 마디 혹은 그 이상의 말씀이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내가 만들었다. 어쩌면 그분은 영화
오늘 늦은 김에 내일도 좀 늦게 출근할까? 그렇대도 전혀 문제가 될 일이 아니다. 내 예전 출근 시각은 일곱 시를 넘어 삼십 분이 되기 전 출근이었으니, 내일 일곱 시 십오 분쯤에 출근을 한다고 해도 틀린 것이 아니다. 지난해까지는, 아니 지지난해까지는 그분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씩은 출근길 엘리베이터 동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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