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 쏟아진다.
오늘은 진짜로 일찍 집을 나섰다. 어젯밤 분명 자정 무렵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다섯 시를 조금 넘어 눈이 떠졌다. 두 눈이며 온몸이며 심지어 정신까지 꺼끌꺼끌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채 온전한 의식으로 눈을 떴다. 핸드폰을 들어 말짱한 정신으로 뉴스를 검색하면서 생각은 딴 데 가 있었다.
'이거 진짜로 늙은 기색을 하는구나, 나.'
정말이지, 젊을 적에는 그랬더랬다. 심한 불면의 날에는 꼭 몸이 힘들고 마음이 흐느적거렸다. 낮 동안 생활이 흐릿했다. 한데 점점 잠을 못 자도 낮이 아무렇지도 않다. 늙어간다는 슬픔(?)을 짓누르고 어서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 꼭 해결해야 하는 업무가 있었다. 사실 며칠 여유가 있는 일이지만 오늘 끝내고 싶었다. 왜? 무거운 마음 내려놓고 어서 내 사적인 일들을 알차게 치르기 위해서다. 독서(요즈음 뜸하지만. 반성할 일!), 그리기, 영화 보기, 글쓰기(글쓰기래야 이곳 블로그 글이지만 가끔 전문적이라고 억지를 부릴 수 있는 글도 쓴다). 이상한 것이 어떤 일이 나를 얽맨다 생각하면 내 사적인 일들을 무지무지 해내고 싶다.
출근 출발은 선글라스를 꼈다. 집을 나서려는데 현관 쪽 유리창에 빨갛게 햇살이 입혀져 있었다. 맨눈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들어가 선글라스를 끼고 집을 나왔던 것. 얼마 전 내게 고마운 마음을 선사해주셨던 아주머니가 일하시는 마트에 들러 일터 내 방에서 몇 칸 건너의 방에 근무하는 내 또래 동료에게 전할 두유 한 팩을 샀다. 지난 주 금요일 복도를 지나다가 만난 우연함의 장에서 장염으로 고생하는 그녀에게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힘들게 걸음을 걷고 있는 그녀에게 내가 말했다.
"어디 아파요? 오랜만이네요."
"예. 오랜만입니다. 장염이 와서요. 못 먹고 있어요."
"어, 살이 빠지겠네요. 좋겠어요( 이 낱말은 정작 내가 던졌던가? 던졌다면 나는 진짜로 배드 걸이구나)."
"흐흐. 우리 나이가 되면 살이 막쪄요."
"그래요, 요즈음 제가 뱃살이 쪄서 너무 힘들거든요."
"저도 그래요. 나잇살이 찔 때가 되었나 봐요. 우리."
이런, 이런, 이런. 나는 참 가볍다. 내 입은 그날, 그 순간 날개를 달았나 보다. 주말 그녀가 생각나면서 나는 나의 일상생활 반성의 길에 나섰다. 뱃살 오른다고 혼구멍을 내주고 있던 내 몸과 함께 제정신이지 못한 나의 영혼을 또 질타했다. 세상에나 이것이 맨정신인가. 온전한 정신이 아닌 채 나는 살고 있구나. 물론 영화 보기며 글쓰기며 베란다 화초들과 이야기 나누기며 매 끼니 챙겨 먹기, 실내운동은 또 열심히 했다.
방금 그녀에게 다녀왔다. 내 또래 비슷할 듯싶은 그녀도 비교적 출근이 이르다. 낫살 먹은 값이 이것인가.
"미안해요. 주말에 많이 반성했어요. 내 입이 가벼웠어요. 장염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살을 빼야 하느니 마느니 운운했으니, 제 입은 바보지요. 많이 나아졌어요?"
"무슨 말씀을요. 그냥 우리 나이, 가벼운 수다 한 편이지요, 뭐."
그녀는 부드러웠다.
그녀와 나는 이년을 함께 사는 동료인데 2년 동안 정면으로 얼굴을 보면서 인사를 나눈 것은 살짝 부풀려도 열 번이 되지 못한다. 아마 다섯 번 이쪽저쪽이리라. 한데, 정말 어쩌다가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장염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그녀에게, 고작 건넨 말이 '좋겠어요'에 '살이 빠지고요'를 했으니.
사실, 그녀는 꼭 나처럼, 보통 사람들에게서 듣는 말이 그 나이에 그게 뭔 배가 나온 거냐일 것이다. 그리 듣는 수준의 연약한 몸이다(나도 사실은 그렇다. 최근 들어 배만 불쑥해서 문제일 따름이다). 그녀는 황당했을 거다. 그런 수준의 몸에 장염을 살고 있는데 뱃살이 빠져서 좋겠다고 했으니. 이런 바보. 나는 바보다. '가벼운 수다 한 편'이었다고 정리해준 그녀에게 다시 또 한 번 고마움을 전하면서.
자, 오늘 아침 일기는 딱 내 의도에 정확하게 맞는 방식이다. 업무 시작 시각이 되려면 아직도 삼십여 분이 남았다. 처리해야 할 일을 일부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았다. 소나기였나 보다. 내가 출근했던 시간의 맑음을 한 순간 짓누르고 퍼붓던 소나기 장대비가 또 거짓말처럼 멈췄다. 조물주의 신비를 실감하는 아침이다.
오늘 하루 모두 잘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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