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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어린 왕자를 들으면서 장대비 속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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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강의를 들으면서 장대비 속을 걸었다.

 

제법 어린 왕자! 여우도 제법~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여섯 시 반이 채 되지 않은 시각에 집을 나섰다. 장거리 출근길을 택하려 했으나 날이 받쳐주지 않았다. 베란다로 내다본 때의 비가 아니었다. 방울방울 제 흔적을 소형의 투명한 구로 보여주는 비가 아니었다. 아파트, 우리 동 건물의 현관을 나서는 순간 하늘은 자기 안에 담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듯 마구마구 비를 퍼부었다.

 

직사각 기둥에 담으면 아주 길쭉한 모양의 입체에 속할 내 몸뚱이는 가느다랗다는 것에 믿음이 컸나 보다. 내리퍼붓는 비는 사방에서 나를 때렸다. 나를 감싸고 있는 옷가지는 축축 쳐졌고 이내 비에 젖어 늘어졌다. 들고나온 우산이 너무 작았다. 양산 수준이었다. 믿음이 과하면 스스로 몸을 파괴한다.

 

3년째 이 시기면 보게 되는 도심 속 공터 화원을 떠올리면서 점점 찬란해져 가는 모습에 함박웃음을 웃게 되니 장대비가 강도가 점차 잦아들었다. 유튜브는 중국이 이 땅 저 땅 헤집어서 농사지을 땅으로 만드는 이유에 대한 강의를 마치고 마침 '어린 왕자'에 대한 강의를 이어서 했다. 알고리즘의 능력은 아직 거기까지는 가지 못했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 첫발을 내디디면서 듣고 싶었던 강의였다. 중국이 식량을 어쩌고 저쩌고 하는 강의를 듣기에는 날씨가 너무 아까웠다. 내리는 빗방울이 내게 던지는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비 혹은 눈 등 하늘에서 내리는 무엇인가가 있는 날에는 가리는 것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늙은 소녀는 이날을 다른 날보다 일찍 시작했다는 것에서부터 뿌듯했다.

 

 

내 워커와 비슷해서 픽사베이에서 가져왔다.

 

워커를 신었겠다. 온통 아스팔트이겠다. 첨벙첨벙 폭우 속을 거닐면서 치기 어린 소녀로 돌아가고픈 마음에 오늘은 느릿한 걸음을 택했다. 새롭게 해석된 어린 왕자를 들으면서, 프랑스 공군 비행사이자 작가였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의 생을 들으면서 걷는 걸음이 오졌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편안함이었다. 나답게 시작하는 아침 출근길이었다.

 

바야흐로 때는 벌써 칠월도 하순으로 들어서겠구나. 눈앞을 막고 있었던 지저분한 요소로 구성된 프로젝트도 마감했겠다. 오늘은 비의 은유를 즐기자. 어릴 적 꿈꾸던 낯선 일상을 기대하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나만의 비밀스러운 날을 만들자. 비밀을 숨긴 요정이 은빛 은밀함을 지레 제 발등에 새긴 기호로 드러내고야 마는 것처럼 나도 그만 어제의 피곤함은 싹 씻은 밝은 얼굴로 빗길을 걸었다. 또박또박 걸음걸음을 지상에 세웠다.

 

평소 출근 시간의 1.5배나 되는 시간을 걸었다. 일곱 시를 갓 넘겨서 일터로 들어섰다. 반년여 출퇴근 시각이면 뵙지만, 여전히 낯이 가려지는 경비 아저씨의 모습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저 여자는 뭐가 저리 일이 많을까 이상해하실까 봐 머뭇거리는데 오늘 아침은 뿌연 물안개 속을 거침없이 걸어 일터 내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건물 곳곳의 배수관 등을 점검하시느라 바쁘셨는지 안녕하시냐는 인사말씀을 드려도 못 들으신 듯싶었다.

 

장마. 이제 좀 그칠 때가 되었나 싶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내가 좋아하는 비에, 그것도 장대비에, 자연스레 따르는 물안개의 이동이 따르는 일터 내 방에서의 외부는 영화 필름 같았다. 영상을 찍으려다가 멈췄다. 지금 내가 바라볼 수 있다면 됐다. 뭘 더 바라는가. 굳이 남기려 들지 말자. 복잡해진다. 절차가 따른다. 촬영한 영상은 또 다른 방법으로 남기고 싶어 할 것이 분명한 나다. 오늘 같은 날은 좀 간단하게 살아라. 오직 내리는 비에만, 장대비에만, 물안개에만 집중해라.

 

이곳 블로그 문을 열면서 나는 음악을 생각했다. 나의 오늘을 함께 시작할 음악. 레퀴엠. 사실 며칠 계속되는 장대비를 내가 이렇게 드러내놓고 좋아할 일이 아니구나. 산 목숨을 거침없이 앗아간 물이었구나. 멈추자. 조용히 하루를 시작하자. 고요히 호흡을 가다듬자. 오늘 하루 내 할 일에 충실하면서 밀도 높인 하루를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이로구나.

 

가신 이들이여~ 수고 많았던 생 잊고 그곳에서는 편하시라.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음악도 열지 않았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조차 허례허식처럼 여겨졌다. 끝냈다고 생각했던 프로젝트를 한 곳 다시 손 봐야 할 곳이 있었다. 오늘 바로 처리해야 해서 오후는 또 바빴다. 퇴근길에는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아들딸 두 녀석을 키우는 데에 큰 힘이 되어주신 어르신 한 분도 오늘 돌아가셨다는 소식이다. 아들 녀석 혼인을 앞둔 언니가 슬픔에 차 있다. 그럭저럭 자기 생을 사느라 바쁜 형제자매보다 그 어르신이 여러 가지로 보탬이 되어주셨다는 것을 잘 안다. 조의금을 받지 않은 상방을 꾸리셨단다. 조카 이름으로 조화를 보내면서 내가 드리는 감사의 염도 모아 보냈다. 고인이시여. 가신 이들이여. 그곳에서는 모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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