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 끝에 느끼는 희열
어제오늘 몸도 마음도 어수선했다. 간신히 버티는 것도 버티는 것이라 하자면 대충 숨쉬기는 한 셈이다. 가까스로 설 수 있는 것도 서는 것이라 하기로 하자면 날은 온전히 나를 품고 지나갔다. 언젠가부터 나를 압박해 왔던 알찬 하루 생활에 대한 의미 실현이 무디어졌다. 그럭저럭 살아나가는 것이려니, 지나치게 수준을 높여서 삶에 의미를 붙이려 들지 말자고 돌아섰다. 탈 없이 지나가면 그것이 낙이려니 하기로 했다.
탈이 생기고 말았던 지난 금요일, 마음이 무너지니 몸이 감당을 하지 못했나 보다. 하늘을 향해 하소연해야 될 일이었으니 어쩌면 내 능력 밖이었는지도 모른다. 반년을 사람의 마음 돌리기에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싶어 마음이 더욱 심란했다. 안 되면 그저 매일 사는 것에 묻혀 가려니 기대했으나 무리로 자리 잡아 내리치는 공격을 당해내지 못한 채 멀뚱멀뚱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어떤 이를 내가 챙겨야만 한다는 생각이 이번에도 도졌다. 내 소속이니 당연히 내가 책임을 지고 해내야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이니 사람과 같이 살자고, 사람이니 조금 아쉬워도 사람으로 대하자고 달랬지만 자기네가 더 억울하다는 식이었다. 용납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해주면 동정이라도 베풀어주지 않을까 했지만, 그녀에 대해 적나라하게 전해주는 사실을 자기네들의 말 쑤시개로 삼았다. 나의 시도는 불발이었다.
덕분에 그제 밤부터 앓았다. 온몸이 굳었고 머리는 평소 무게의 대여섯 배는 된 듯 바윗덩어리가 얹어졌다 싶었다. 급기야 어제 오전부터는 코도 막히고 콧물이 질질 흐르고 심한 기침에 두통, 몸은 끝없이 가라앉았다. 혼돈의 꼭대기였다. 평소 감기 몸살 비슷하다 싶으면 내게 처방하는 타이레놀 두 알씩을 어제 점심 후와 저녁 후에 복용했으나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오늘 아침 남자에게 명령조로 내 목적을 하달했다.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약국을 검색하라.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가장 믿을 만한 곳을 고르라. 그리고 약을 좀 지어오라.
남자는 이것저것 톡으로 보낸 나의 증상을 보고는 어느 약사가 이렇게나 많은 증상을 읽고 그냥 약을 줄까. 아마 병원을 다녀와서 조제약을 지어가라고 할 것이라며 약국 가는 것을 머뭇거렸다. 나는 반 죽음 상태라야 지을 수 있는 온갖 바디 랭귀리를 사용하여 남자에게 약국을 다녀오게끔 했다.
"병원을 가는 것이 훨씬 나았을 듯. 무려 일만 얼마야, 약값이."
내가 약봉지를 받으면서 되받았다.
"됐어. 병원에 가는 것은 싫어. 그리고 내 꼴이 지금 말이 아니잖아."
"아니, 아파서 병원에 가는 사람이 그럼 꼴이 말이 아니어야 정상이지. 화장하고 정장을 차려입고 말쑥한 모습으로 나감?"
속으로만 되받았는데 내가 소리를 냈더라면 위와 같은 대화가 오갔으리라.
일단 약이 맘에 들었다. 어쩐지 잘 들을 것 같았다. 감기, 콧물, 코막힘용으로 두 알, 기침용에 한 알, 그리고 한약 같은 액체 탕약 모음이었다. 타이레놀에만 의지하는 나의 감기 처방은 내일 출근을 위해 적당한 짓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서 사 오게 한 것. 약의 조합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뭘까.
남자는 점심으로 매생이국을 끓여줬다. 안도현의 시 '매생이국'에서 읊어지는 멋도, 맛도, 아름다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나 입맛이 없는 날이 있었던가를 새삼스럽게 떠올리는 끼니였다. 매생이국에 밥을 말아 김치를 얹어 먹었다. 찐 두부 두 조각도 함께 먹었다. 약 기운을 이겨낼 수 있으려면 아무리 밥맛이 없을지라도 배 속을 채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십 분 여 거실을 걷다가 약을 먹었다.
줄곧 잤다. 그 상황에서도 유튜브가 끝나면 다시 재생시키는 일을 몇 번 계속하면서 자고 또 잤다. 말끔하다. 두 시간여 자고 나니 정신이 말끔해졌다. 다시 태어난 기분. 약을 먹기 전까지, 오늘 오전까지, 도무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던 몸의 이상 기류가 이젠 생각나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개운한 것이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통증 끝에 느끼는 희열'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희열을 느낀다. 극심한 통증을 만나면 마침내 이것도 지나가리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고 난산 끝 아이를 처음 보듬을 때의 온갖 기쁨처럼 그렇게 커다란 환희를 만나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내일 또 출근하여 나는 '괴생명체'라고 이름 지은 인간과 다시 얼굴 맞대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하루를 보내리라.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한 채 괴생명체(혹은 괴생명체들)에게 밉보이고 있는 그녀도 무덤덤덤 함께 생활하리라.
사실 내가 괴생명체들이 하는 '짓거리'에 반응만 하지 않으면 된다. 그들에게 하소연하지 않으면 된다. 그들에게 제발 좀 그녀를 보살펴주자고 어르지 않으면 된다. 바보. 나는 왜 일을 만든 것일까. 잠깐 그녀가 괴생명체들로부터 당하는 아픔(그녀는 그것을 아픔이라고 여기 지도 않으리라. 자기 제어가 되지 않으므로)을 내가 못 봐서 들고일어나지 않으면 되는 것을. 제발 그냥 둬라. 내버려 두자. 내 일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판이다. 물론 우영우는 드라마이다. 내 일터의 일은 현실이다.
잠 중에 아이에게 어서 부대에 복귀하라는 메시지가 간 것을 확인하였다. 남자는 누운 채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는 내가 귀찮은지 오후에는 나가버렸다. 아이는 어젯밤 자정까지 청주 지하도 침수 현장에서 대민 봉사차 나가 있었다고 한다. 불행히도 물 막음이 되지 않아 어떤 이도 구조되는 것을 만나지 못한 채 귀대했다고 한다. 안타깝다. 오늘 오전에야 차량에서 발견된 사람들의 소식을 뉴스판으로 읽을 수 있었다. 안쓰럽다. 어쩌다가, 딱 그때 그곳을 지나가야 했을까. 더군다나 대형버스는 장마라서 가던 길을 바꿔 간 것이 화근이었다고 한다. 사람의 목숨은 운명인가. 가신 이들에게 조의를 표한다.
끊임없이 장맛비가 줄줄 내린다. 나 태어나 이렇게 많은 비는 처음인 듯싶다. 지구의 기상 이변이 현실화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제 발등 찍을 일을 해온 셈이다. 적당히 살 필요가 있다. 적당히 먹고, 적당히 입고, 적당히 숨쉬기를 생활화해야 한다. 더 이상 플러스로만 나아가려는 탐욕 달성 지향을 버려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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