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이프/하루 공개

어쨌든 베란다에 놀러 와있는 가을볕들이 참 고맙다

반응형

 

 

 

어쨌든 베란다에 놀러 와있는 가을볕들이 참 고맙다. 

 

 

 

그 와중에도 싱싱한 베고니아! 수채화 풍으로  찍은~

 

 

베란다가 환하다. 어제 오후 산행에서 만났던 늦더위와는 사뭇 다른 햇볕이 놀러 와있다. 하룻밤 새 앙칼지게 째진 눈자위의 힘을 덜고 온 듯싶다. 마루 바닥에 뻗친 볕이 자랑하는 직선의 처음과 끝이 두루뭉술하다. 모나지 않고 튀지 않고 유연하다. 둥그스름한 뭉텅이로 퍼질러 앉아 있다. 설익은 사랑싸움일랑 헤프게 하고 싶다.

 

덕분에 선을 덮고 있는 볕의 여유가 부드럽게 널브러져 있다. 가을볕에게 얼굴을 내민 율마 잎의 초록이 건강하다. 태어난 지 한 해를 겨우 넘긴 새끼 율마 가지 끝에 열린 잎들은 아직 연두이다. 곱상하다. 꼬물꼬물 하다. 고 녀석들, 이쁘기까지 하다. 이쁜 율마. 보는 이의 눈을 참 선하게 한다.

 

 

내 곁을 떠나다 1

 

아침나절, 두 시간 넘게 베란다에 있었다. 뭇사람들의 표현을 빌어오자. '베란다 정원'이다. 어디 덥석 이름을 대며 '내가 가꾸고 있소'라며 내놓기도 부끄럽다. 어수선하면서 꾀죄죄하다. 궁상스럽고 지저분하다. 화분들은 얽히고설킨 채 뒤섞여 앉아 있다. 혹은 비스듬히 누워 있기도 하다. 가지런하지 못하다. 마구 헝클어진 채 벌려져 있다. 불안해하는 화분들의 심사를 족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와중에도 환하게 꽃 핀 아자리아.

 

 

계획대로 화분의 숫자를 줄여가고 있다. 무서워졌다. 삽목. 단순한 가지치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잘린 녀석들은 그냥 버리자니 아깝고, 안쓰럽고 불쌍하다. 발동한 측은지심은 화분 증가의 원흉이다. 쓰레기통으로 넘겨진 가지들은 몇 되지 않다. 꺾은 가지들을 물이나 흙 속에 파묻는다. 우주 탄생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식물계의 생명력은 질기고 또 질기다. 식물 종들의 생을 버티기 위한 집요함은 새로운 생을 넙죽넙죽 내놓는다. 또 한 세대의 자기 생을 늘 다시 시작한다. 물만 만나면, 바람 기운만 조금 쐴 수 있다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내 곁을 떠나다 2

 

 

며칠 물을 갈아주면서 기다리면 식물들은 대부분 숨구멍을 찾아 빼꼼히, 뿌리의 머리 부분을 세상 밖으로 출현하게 한다. 생명의 재탄생을 알린다. "에구머니나, 기어코 살아냈구나. 고맙구나. 고맙구나. 잘 살아내렴." 주인이 건넨 몇 술 덕담에 원기 충천한다. 하늘을 향해 생명의 기운을 치솟는다. 1, 2주일 더 물갈이에 정성을 들이면 쑥쑥 자기 생을 탄탄하게 다진다. 본 화분에 새집을 짓게 될 꿈을 꾸고 있다고 싱싱한 뿌리가 말해준다. 새 생명을 되도록 살게 했다. 우리 집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화분 몇 씩 들려 보내는 기쁨이 컸다. 그러나 베란다는 꽉 찼다.

 

한 쪽으로 밀려났지만 그래도 꽃을 피우다. 제라늄

 

커다란 화분 위에는 층층이 꼬마 화분들이 들어앉았다. 어느 베란다 정원지기의 말이 생각난다. 화분 수 늘어가는 것이 고민이었다. 어디 둘까 걱정되더라. 그런데 새 화분 만들면 영락없이 자리할 곳이 또 생기더라. 정말로 그랬다. 이 귀퉁이, 저 귀퉁이, 요 화분 위로 되똥, 그 화분 위로 뒤뚱. 위험천만하다 싶어도 이 방법이며 저 방법 등 시시때때로 유용한 방법은 절로 만들어졌다. 귀신같이 새 화분을 만들어 세우고 또 만들고 세웠다.

 

 

내 곁을 떠나다 3

 

 

물 없이 키우는 화분 흙을 알게 되면서 화분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사용하고 난 예쁜 화장품 그릇 등을 쉽게 버릴 수 없었다. 눈에 꽂혔다. 미니 선인장이 동시에 떠올랐고 아기 묘목들을 이미 안고 있었다. 물 없이 키우는 화분 흙을 넣어 새끼 다육이며 어린 묘목을 키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각종 이러저러한 통들이 꼬마 식물들의 귀여운 집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고마운 흙이로구나. 진즉 좀 알았더라면 화분에서 넘쳐흐르는 물이 없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자른 가지들 중 삽목에 맞다 싶으면 단 한 가지도 버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꼬맹이 식물들에게 살 집을 마려해줬을 때의 뿌듯함은 어떠한 말로도 다할 수 없었다. 부지런히 화분들은 늘어만 갔다.

 

한쪽으로 쫓겨난 제라늄, 그래도 꽃을 피우다 2

 

2년 전일까, 3년 전일까. 식물 키우기의 절차에서 멀어져도 너무 멀어진 것이다. 화초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분갈이를 원했다. 새로운 양분을 원했다. 신모델을 원했다. 최신형 디자인을 요구했다. 물 주는 것에만 헉헉거리고 있는 주인에게 능력 없음을 단호하게 판정하였다. 주인은 의욕 상실로 제 삶도 어찌하지 못해 몸부림을 치던 중이었다. 분갈이는 먼 이야기였다. 흙에 막혀 물이 제대로 흘러내리지 않는데도 내버려 뒀다. 화려하던 꽃들이 말라비틀어진 채 떨어져 쌓이고 큰 화분 아래 기생하여 살던 작은 화분들은 낙엽이며 지는 꽃들의 낙화에 덮여 숨도 제대로 쉬질 못하였다.

 

내 일일 수가 없구나. 내 능력 밖이구나. 그때부터 가지치기도 하지 않았다. 덥수룩하게 모형을 잃은 잎과 가지들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사 사삭 무너지기 일쑤였다. 납작해진 의욕에 뻐끔 힘을 가하면서 '단순하게 살자, 간단하게 살자, 최소한으로 살자, 단정하게 살자'는 주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식물도 정리하기로 했다. 미니멀리즘. 결코 유행을 따르자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달고 살던 질병은 그 뿌리가 규칙을 저버린 거미줄이었다. 너저분하게 얽힌 것들로 인해 고단한 호흡이 가까스로 반복되고 있었다. 이것이 뿌리인지, 저것이 잎인지, 요것이 줄기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내 곁을 떠나다 4

 

자고로 식물이란 뿌리는 뿌리이고 줄기는 줄기이고 잎은 잎이고 꽃은 꽃이고 열매는 열매여야 한다. 아파트 베란다는 그런 한계를 분명하게 가름하고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큰 결단이었다. 특히 나의 아파트, 내가 사는 아파트는 그랬다. 제아무리 산뜻하고 아름다운 꽃이 피더라도 꽃식물은 퇴출하기로 했다. 혹은 축소하기로 했다. 베란다에서 피는 꽃은 꽃이래야 반만 꽃이었다. 모양만 꽃이었고 이름만 꽃이었다. 꽃이 꽃답지 못했다. 빛과 바람의 한계였다. 탐하기에만 바쁜 여자의 게으름이 원인이기도 했다.

 

자, 버리는 방법이다. 첫째 깡그리 버린다. 화분 채 버린다. 둘째 식물체만 거둔다. 화분과 화분 흙을 버린다. 셋째 화분과 식물체를 거둔다. 흙만 버린다. 오늘도 화분 흙을 20리터는 족히 버렸다. 흙은 보통 십 년을 넘게 나와 산 것들이다. 버려진 흙은 이미 안고 있던 식물체가 떠난 뒤였다. 제라늄 종류는 물 없이 키우는 화분 흙에 심었다. 옹기종기 제라늄들만 모여 사는 코너로 이전하였다. 녀석들은 바깥 창 쪽에 들어앉아 돌아가면서 예쁜 꽃을 피울 것이다.

 

내 곁을 떠나다 5

 

문제는 사그라졌다가 떨어지는 잎이다. 전 잎. 시든 잎이다. 몸만 붙잡혀도 뚝 떨어지는 잎들은 생에 대한 의지가 태부족하다. 너무 많은 힘으로 살아낸 뒤다. 별생각 없이 툭 떨어진다. 그런데 그 전 잎을 골라 뜯어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미관상 두드러지게 추하기도 하다. 꽃과 어우러질 때 최악이다. 꽃을 쓰다듬으려 들면 그 아래 누렇게 뜬 전 잎이 아우성이다. 고작 며칠 피고 지는 것들이 그리 아름답던가요? 생을 다 바친 우리에게 부드러움을 좀 다오.

 

전 잎도 꽃잎도 최소한으로 버려지는 식물을 키우기로 작정했다. 분갈이도 이십여 년을 족히 견디는 식물들만 기르기로 했다. 제법 화분 수를 줄였다. 제라늄만 빼고 꽃식물들도 몇 있지 않다. 내년 봄에는 꼭 깔끔하게 정돈된 베란다 정원으로 다시 돌아오리라. 어쨌든 베란다에 놀러 와있는 가을볕들이 참 고맙다. 식물 녀석들에게는 꿀맛일 것이다. 참 보약이다.

 

 

반응형

'라이프 > 하루 공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차렐라 치즈에게 지다  (23) 2022.10.05
쉬는 날이었구나  (38) 2022.10.03
멈출까  (28) 2022.09.30
하얼빈과 사할린이 왜 내 안에 공존해 있는 것인가  (28) 2022.09.29
아침과 오전의 큰 차이를 인정하노라  (22) 2022.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