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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오래전에 만났던 시를 꺼내 읽는 아침일 수 있어 오늘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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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만났던 시를 꺼내 읽는 아침일 수 있어 오늘이 참 고맙다.'

 

 

 

나는 아마 이 시집을 먼저 샀을 것이다. 나의 단골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가져옴

 
 

지난해 12월 28일의 문장이다. 오래전에 만났던 시를 꺼내 읽는 아침일 수 있어 오늘이 참 고맙다. 위 문장은 오늘이 넘어서면 사라질 문장일 수 있다. 이곳 블로그의 임시저장에 얹어져 있는 글들은 3개월이 지나면 사라진다고 알고 있다. 100개의 글이 임시저장으로 있을 때에도 하나씩 사라진다고 알고 있다. 정확한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시였을까. 나를 살게 했던, 이제는 아득한 곳에 주저앉아 있는, 나의 안쓰러운 과거를 들춰본다. '빈 집', '태양미사', '가재미', '산정묘지', '물의 꿈', '왼손을 위한 협주곡', '비정성시' 등. 이 시들은 모두 외우고 있었다. '있었다'. 과거형이다. 지금은 이 모든 시들이 '내가 외우고 있는 시 목록'에서 지웠다. 즉 내 뇌에는 이제, 전문을 외우고 있는 시들이 없다. 깡그리 지워버렸다. 아니 지워졌다. 시들이 적극성을 발휘하여 제 스스로 나의 뇌를 탈출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내보냈다. 

 

 

불행이다. 매일 하나씩 시를 외우던 시절이 있었다. 늘 아침이 바빴던 시절이 떠오른다. 죽자고 외웠다. 이곳 아닌 타 플랫폼의 블로그에 시를 외우고 외운 시들을 올렸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내 생이 늘 무엇인가로 꽉 찬 시기였다. 무엇으로? 글쎄다. 아이를 돌보는 일에 온 정신을 쏟던 시절이었으니 육아 관련 일들이 아니었을까. 지금이라고 아이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나에게 아이에 대한 생각만 있을 뿐 어느 것 하나 내 요량을 아이에게 강요할 수 없다. 하여 나는 내 안에 아이를 위해 해주고 싶은, 하게 하고 싶은 일은 엄청 많지만 '내 안의 고요'라는 방을 하나 만들어 그 속에 침잠시켜 뒀다. 말하자면 지금은, 외웠던 시마저 깡그리 내처 버린 지금은 빈 구석이 많다. 무언가 외부에서 들어온 거친 것들이 마음 놓고 입실할 수 있는 허술한 곳이 참 많다. 

 

 

빈 틈 커지고 많아진 나의 생. 하여 늘 붕 떠 있다.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서슬 퍼런 세계 경제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 경제의 흐름을 담은 뉴스로 소중한 아침 시간을 보내야 하고 지저분한 뭇 타인들의 뉴스 점령사도 일부러 검색하여 꺼내어 읽을 시간이 있다. 영화 '버닝'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늘 글을 읽는다는, 특히 시집을 좋아하고, 글을 쓰곤 한다는 소문을 들어 시청했던 주인공, 물론 소설로 먼저 내게 온 이창동 감독의 영화였기에 일부러 보게 된 것도 있지만, 그 영화 '버닝'의 주연 배우, 그 배우의 오물 범벅의 생을 뉴스로 읽던 날은 너무 슬펐다. 

 

 

시인들 중에도 나를 맘 아프게 한 이들이 있었다. 특히 그. 언젠가 이곳 블로그에 그를 들먹여서 쓴 글이 아마 있으리라. 영화 '버닝'의 주연 배우로 인한 실망보다 몇 수십 배 더 큰 실망이었다. 솔직히 당시, 그 시인의 스캔들을 읽고 알게 된 그날, 나는 참담했다. 왜? 그는 절대로 그런 생을 살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디를 봐도. 내가 하늘에 맹세코 약속할 수 있는 나의 사람이었다. 내게 살고 싶은 힘을 기꺼이 선사해 주는 사람이었다. 시인이었다. 

 

 

그리고 이 시집도 가지고 있다. 이 시집을 몇 권이나 샀을까. 선물로 주기 위해 여러 권을 샀더랬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가져옴

 

 

그의 시는 한때 나를 미치게 했다. 지금도 나는 가끔 마음속으로, 자기 몸을 태워 농이 되면서 이내 굳어지는 촛불처럼, 내 안에서 흐르는 눈물이 이내 참담함으로 굳어져 병이 될 수도 있을, 그리고는 마침내 산화되는 내 일그러진 꿈만큼이나 나를 아프게 했던, 나의 말초신경 가닥가닥까지 절절하게 했던, 그의 시를 사랑한다. 

 

 

'오래전에 만났던 시를 꺼내 읽는 아침일 수 있어 오늘이 참 고맙다.' 아마 임시저장된 이 문장에 해당된 시는 그 시인의 시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를 잘 알지만 나는 오늘 '오랜만에 만났던 시'로 김경주의 시를 읽으련다.  다시 외우기 위해 몸부림을 쳐보고 싶다. 몸부림? 지금 이 시점에서 나의 뇌는 몸부림을 쳐야만 시 한 편을 외울 수 있다. 

 

 

나는 이미 노쇠했다. 나의 뇌세포는 씁쓸한 자기 위로를 퍼부으면서 시를 외워보고자 분투해야 한다. 해 보자. 한번! 김경주의 시를 외워보자. 수없이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면서 외우는 과정에서 나는 그를 짓이기련다. 그러나 그의 부활을 기원하면서. 영화 '버닝'의 주연 배우도 부디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기다리면서.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지치고 스러져 가는 자기 육신과 정신으로 인하여 방황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모두 '부활'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원하면서. 오늘 시 한 편을 외워보련다.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던,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꺼내들고 어머니

볼에 따뜻한 순면을 문지르고 있다

안감이 촉촉하게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한 무늬였음을

오늘은 죄 많게 그 꽃무늬가 내 볼에 어린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 순간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던 것처럼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으리라

빨랫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들로

뜬 눈 송이 몇 점 다가와 곱게 물든다

쪼글쪼글한 꽃 속에서 맑은 꽃물이 똑똑 떨어진다

눈덩이만한 나프탈렌과 함께

서랍 속에서 수줍어하곤 했을

어머니의 오래 된 팬티 한 장

푸르스름한 살 냄새 속으로 햇볕이 포근히 엉겨 붙는다

 

- 김경주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9)


 

업무 시작도 훨씬 전에 오늘 아침 일기를 마칠 수 있어 참 기쁘다. 오랜만에 시를 읽을 수 있는 이 아침이 눈물겹다. 내 생을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라고 하면 억지일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내가 천주교 신자가 아닌데도 매일 아침 성경 한 문장에 명상 한 자락씩 섞어 보내주시는 수녀님께 감사드리면서 오늘 하루를 시작한다.

 


결국 시를 외우지 못했다. 시가 너무 길었다고 변명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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