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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오랜만에 독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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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독서를 했다.

 

 

시립 도서관에서 빌려오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쏘세키 작

 

 

 

지난주 유튜브 '일당백(짧은 제목만 가져오다.)'을 보다가 정박 선생님께서 들먹이신 소설을 빌려왔다. 오랫동안 꼭 읽으려니 했는데 읽지 못했다. 읽으려니 읽으려니 하다가 읽지 못한 몇 안 되는 소설 중 하나이다. 문자와 만나기 전에 글의 내용을 구전으로 알게 된 것 때문일 것이다. 구전. 딱히 구전이랄 수도 없다. 이곳 저곳에서 얻어 읽고 들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다. 정말로 오랜만에 하는 독서다. 제목만으로도 너무 유명하다. 나는 소세키의 소설 단편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거의 모두를 다 읽은 듯하다. 일본인들의 사생관(죽음에 대 한 생각)을 여실히 엿볼 수 있는 <마음>은 아마 두세 번을 읽었을 게다. 상당히 읽었다. 그런데 현재 내 곁에는 소세키만 있고 소설들은 나를 벗어났다. 

 

읽은 소설들이 나를 버린 것이 그리 아쉽지 않다. 얼마나 시건방진 말인지 잘 안다. 살다 보니 보니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한 현실은 소설을 그다지 귀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더라. 더구나 근래 4, 5년을 영화로만 살다 보니 읽은 소설들과 멀어진다는 것이 크게 안타깝지 않았다. 나는 현재 '메가 tv'에서 평점 5점 만점에서 3.7점 정도 위의 것은 4분의 3 이상 본 듯싶다. 심지어 이 영화와 저 영화에 그 영화까지 가져와서 새로운 영화 한 편을 내 뇌세포들이 창작할 정도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 소설은 제목만 늘 가까웠을 뿐 읽지 않았다. 정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고양이의 눈으로 인간들을 꼬집는다고 한다. 쉽게 읽힐 것 같았다. 최근 들어 책장에 더 이상 책을 꽂아서는 아니 될 것 같은 위기감에 도서 구입을 거의 하지 않은 관계로 가까운 시립 도서관에서 대여해 왔다. 소설이 영화에 밀려 멀어진 것이 그다지 슬프지 않다고 하지만 소설은 소설이다. 대여해 온 책을 본 순간 내 생의 한 축이었던 그때 그 시절의 독서 습관이 떠올랐다. 

 

거짓이었다. 소설이 나를 버린 것이 별 일이 아니라고 한 것은 거짓이다. 나의 건망증을, 살만큼 산 나이를 생각해 보니 나의 지난 시간 중 최고의 전성기를 소설과 시로 보냈다. 1년에 100권 이상씩을 읽었다. 반신욕을 시작했다가 소설을 읽느라고 물이 식은 줄 몰랐던 날 기침을 해대다가 허둥지둥 욕조를 탈출하던 때가 있었다. 여름과 겨울 휴가 때면 내 일터 도서관에서 3, 40권씩 빌려와 읽으면 밑줄 그을 수 없음을 한탄했던 시절이 있었다. 종이 일기장에 다 읽은 책에 대한 소감을 번호 붙여 적으면서 마냥 뿌듯해하던 세월이 있었다.

 

4년 전인가, 5년 전인가. 나를 무기력증의 세계로 치닫게 하는 일이 터졌고 나는 어떤 일을 차분히, 지긋하게 할 수 있는 환경과 멀어졌다. 돌아보니 그 또한 생각하기 나름이었는데 세상사 부정적인 관점으로 사는 것에 길들여진 나는 그만 의욕 상실과 함께 책 읽기에서도 멀어졌다. 주어진 시간은 옛날과 같았고 늘 해오던 일을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발생한 삶의 덧없음에 틀어박히는 것에 겁이 났다. 책 대신 영화를 붙잡았다. 마음 가라앉혀 단정한 모양새로 앉아 문자를 인식하는 대신 방방 방 심한 굴곡의 심사로도 취할 수 있는 것이 영화였다. 나는 대게 집에서 영화를 보기 때문에.

 

책 못지않게 함께 해오던 영화보기였다. 그다지 어렵지 않게 영화에 매달릴 수 있었다. 휴일에는 하루 서너 편씩 보기도 했다. 전생이 뛰어난 단편 제작으로 촉망받았으나 그만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치고 만 영화감독이었을까. 아님 전생이 천하의 미모를 타고났지만 그만 우울증으로 짧게 생을 마감한 여배우였을까. 이런 생각을 할 만큼 제대로 영화광이 되었다. 내 생과 영화는 찰떡궁합이었다. 매번 다음 생에 혹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꼭 영화 관련 일을 맡아하리니. 극작가랄지, 영화감독이랄지, 무대미술작가랄지 등. 물론 배우는 꿈 꾸지 않았다.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정박 선생님의 말마따나 인간사를 적나라하게 공격하는 야무진 고양이 한 마리가 주인공이다. 학교 선생인 선비 타령파가 고양이의 주인이다. 꿋꿋하게 자기 세계를 꾸려가는 한 선비파 선생님 무릎을 주 서식처로 사는 고양이. 그는 고고한 주인아저씨인 선비네에 들락거리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과 관련된 사람들의 언행을 주의 집중하여 관찰하면서 은근한 힘으로 인간사를 콕콕 찍어댄다. 니들 못지않게 고상한 동물이야. 고양이인 나도 사람과 똑같아. 인간들아, 니들 그러는 것 아니야를 외치면서 세계 곳곳의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인물들과 작품들을 엮어가면서 글은 전개된다. 고양이의 주인인 선생님은 나쓰메 쏘세키처럼 위장병을 앓는다. 나쓰메 쏘세키는 위궤양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3분의 1쯤 읽었다. 이제는 책도 천천히 읽으리. 더 이상 속도에 매달리고 읽은 권수에 얽매일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따북 따북 나 자신의 심사를 책 속 내용에 엮어가면서 읽어내리라. 다시 읽고 싶으리만큼 아름다운 묘사에서는 좀 긴 시간을 좀 머물 것이다. 난생처음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 사고사의 기록이 있으면 멈춰 검색도 해 볼 것이다. 곳곳에 하이쿠가 등장한다. 내 심장을 뒤흔드는 5.7.5, 17음을 읽게 되면 내 캘리그래피로 힘 있는 글씨에 운율을 실으리라.

 

첫 번째로 베껴 본 문구가 이렇다.

'단지 거짓의 껍질이 드러나면 곤란하다.'

소세키가 들먹인 인물 중 그 인물의 행위를 읽으면서 한참 머물러 생각한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때문이다. 

다빈치가 문하생들에게 하게 한 것이 있으니 성당 벽의 얼룩을 그대로 사생하게 했다는 것. 이에 짓궂은 인물로 등장하는 주인공 고양이의 주인인 선비네에 들락거리는 선비의 친구는 덧붙인다. 변소에서 사생을 하라.

 

아, 초반부 몇 페이지 넘기지 않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녀석으로부터 인간계의 허를 찌르는 충격적인 그의 생각을 듣게 되는데 다음 문장이다.  

'아저씨처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일기라도 써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자기의 참모습을 암실 내에서 발산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나, 우리 고양이족은 사사로운 일상생활 그 자체가 거짓 없는 일기이니 달리 귀찮은 수고를 하며 자기의 참모습을 보존할 이유가 없다. 일기를 쓸 틈이 있으면 마루에서 자는 게 훨씬 낫다.'

 

그래, 나 중3 때였을 게다. 동안 써 오던 내 모든 글들을 방 한가운데에서 태웠다. 하여 장판이 일그러지고 하마터면 집에 불이 날 뻔했다. 어디 청소년 잡지에 투고하려던 소년 소녀의 아름다운 사랑 소설도 한 편 포함된 채였다. 

 

 

여유 있게 읽으려니 그럴까. 아님 너무나 오랜만에 글을 읽으려니 잃어버린 습관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왜 이렇게 잠은 오는지. 하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내내 실내 운동을 병행했지. 스쾃이며 뭐며 등등.

 

 


오늘은 저녁 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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