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고 일어선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이 일어섰다.
이틀째 서너 시간의 수면이 이불 속 탈출을 힘들게 했다.
친구라 하자. 오랜만에 만나자는 전화였다.
추위에 무척 약한지라 겨울 냄새만 풍겨와도 속곳을 열심히 챙겨입고 다니는데.
와우, 실내 온도를 무지무지 올려놓고 살았던 관계로 '외부 기온'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나 보다. 촉감으로 생체험을 한 상태에 대한 느낌이 좀처럼 떠올려지지 않아 베란다 창밖을 바라보는 시각 정도의 감으로 의상을 챙겨 입고서 집 밖으로 나왔다. 긴 롱코트 안에 상하 딱 하나씩만 입은 상태로 외출했다.
무작스럽게 추웠다.
높은 산 바로 아래에 내 사는 곳이 위치한 관계로 우리집 근처에서만 바람이 세겠거니 했는데 아래로아래로, 땅으로땅으로 제아무리 내려가도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거센 바람은 체감온도를 왕창 낮췄고 온도계 속 수은의 위치는 최대한의 하강 때문에 온 몸이 으스러져가고 있었다. 제 무거운 무게를 견디질 못한 채 단 한 눈금일지라도 어찌 상승을 해 볼까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바람은 퍼머 시기를 무려 일고여덟 달을 넘긴 머리카락을 사방팔방의 방향에서 얼굴로 내리때리게 했다.
머리카락은 힘없이 가라앉았고 마침내 두피에 딱 달라붙어 강력 왁스칠을 한 모양새로 차 속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일년 여 만에 만난 친구는 어제 만난 것처럼 느껴졌지만 몇 년 전에 불거진 사건으로 인해 생긴 거리는 여전히 그 길이가 좁혀지지 않았다.
저 친구는 혹여 내가 있던 자리를 이미 비우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전화라니. 그녀 속 마음이 궁금해졌다.
나 또한 이미 저 친구가 내 안에 자리하던 곳을 깔끔하게 청소하고는 다른 친구를 맞이하였거나 차라리 빈 곳으로 두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던 것은 아니었나.
추위를 핑계로 서너 시간을 차 안에 앉아 척추가 불편해졌다 싶을 만큼 쓸 데 없는 이야기를 반복하였다.
우리가 친구라는 이름으로 만나기 시작한 이후 지속적으로 오가던 내용들의 대화였다.
늦은 점심을 먹고 얼마 전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새 건물의 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셨다.
아직 가시지 않은 페인트의 회색 냄새가 실외 찬 기운과 실내 난방의 혼합 물질 형태로 어수선하게 풍겨왔고 알바인 듯한 아줌마스렂 바리스타는 어설픈 폼새로 커피를 내왔다.
두 잔의 카푸치노를 컵 가득 담아왔다. 조선 말 남도 땅 대감네 상머슴이 먹던 고봉밥이 이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카푸치노는 우유를 섞은 커피에 계핏가루를 뿌린 이탈리아식 커피를 말하는데 내온 것에는 내 좋아하는 계핏가루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초콜릿 가루의 흔적도 전혀 나풀거리지 않았다. 바리스타는 미니멀리즘 카푸치노를 구현하고 있는가 보다.
우유 거품으로 장식된 하트는 내 손 안에 자리하기 전 이미 오른쪽 상단 귀퉁이가 일그러져 있었다.
지나치게 반복되어 일그러짐의 모양새가 진하게 형성되어 마침내 깨진 사랑으로 옮겨가는 유행가 가락의 파편이 이런 모양새일까.
찢긴 우정의 살을 꿰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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