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라.
출근길, 정박 님이 강의하시고 정영진 님이 진행하는 유튜브 <일당백>에서 '지식인의 두 얼굴'을 들었다. '오늘도 그리러 갑니다'에 이어 두 번째 듣는 강의였다. 유튜브가 있어서 출근길이 쉽다. 게으르고 또 게으른, 게으름이 타성이 된 인간, 나에게는 유튜브가 나에게 그나마 남은 지식 섭취의 의지를 충족시키는 데 한몫 크게 한다.
<일당백> 강의는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의 강의를 하더라도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재미가 누구의 힘일까. 셋 모두의 힘이다. 주된 강의 중심의 정박님과 자연스럽고 재치있게 강의를 이끄는 정영진 님과 성우 이지선 님이 고운 목소리로 덧붙이는 진행 보조까지 모두 참 조화롭고 균형있다.
오늘 강의에서는 '자본론'의 저자인 '칼 마르크스'의 생을 들여다보면서 조각 조각 우리들을 깜짝 놀래키는 '모순'을 들려주셨다. 뒷부분에서는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유명한 극작가이자 시인인 브레히트의 삶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강의 끝에 정박님이 말씀하셨던 다음 문구가 오늘은 참 인상적이었다.
'의심하라, 疑心하다'
'의심하'라는 말은 어떤 상황을 불확실해서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정답만을 추구하는 세상을 살아왔다. 딱 하나의정답이 있다.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정답. 그 정답을 따르고 고르느라 평생을 바쳐왔다. 설령 도무지 아닌 것같은 답일지라도 출제자가, 감의자의 위치에 있는 이가 정답이라고 주장하면 답이었다. 심지어 상관이 답이라고 하면 답이었다. 무찌를 수 없는, 무찔러서는 안 될 상황을 정답으로 여기면서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왔다. 불쌍한 생!
이는 내가 무시되는 것을 말한다. 내 생각과 내 말과 내 지식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못 믿겠다는 식으로 무찌름을 당하곤 한다. 그런 세상을 살아왔다. 내가 아는 내용이 뭐 대단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래도 꾸려온 생, 뭔가 주워담아온 지혜 혹은 지식이 있을 수 있는데, 상하가 형성된 관계에 서면 나는, 즉 아랫사람은 그 어떤 것도 생판 모르는, 무지한 사람으로 내처지는 세상을 살아왔다. 하여 무시당하면서 사는 것은 천직이었고 감히 의심일랑은 저 건너 남의 일이었다. 그저 끄덕끄덕 수긍하면서 살아왔다.
세워진 정답에 반하는 태도로 함부로 남을 의심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배워왔다는 것이다. 의심은 '부정적인 기류'를 형성하는 못된 반응으로 인지되어 왔다. 심지어 대체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왔길래 그렇게 의심이 많으냐는 식의 공격도 받았다. '못된 사람', '부적절한 사람'으로 취급되어 무리에서 제외되는 수도 있었다.
이제는 옛날 이야기이다. 판이하다. 다르다. 의심하는 자만이 발전적인 사람이라는 말까지 한다. 좋은 세상이다. 사실, 의심은 그저 부정적인 한 성향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궁금해하는, 탐구 정신이 투철한, 도전정신을 야무지게 지닌 사람이 할 수 있다. 다중사회인 현대를 살아가기에는 꼭 필요한 사람일 수도 있다. 의심하는 자만의 앞날이 기대된다고도 한다. 어떤 무리를 더더욱 발전적인 묶음으로 살아내게 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세상이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강의 내용 앞뒤 다 자르고 어쨌든 정박 님이 강의 마지막에 내려주신 문장인 '의심하라'를 실천하려고 하니 내가 마치 일터 신규 직원으로 재탄생한 기분이다. 남은 세월, 뭐 신규처럼 싱싱한 모습으로 살아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라떼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젊은 피처럼 살아보고 싶으니 내 행동을 막지 마.'라고 하면 미움을 받는 일은 없지 않을까.
그래,
'그것 왜 그러는겨? 내가 한번 조사하고 해결해볼게.'
라고 덤비면 피 끓는 청춘들이
'참 내, 요란하네.'
라고는 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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