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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첫 문장을 기다리는 설렘을 나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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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을 기다리는 설렘을 나도 살고 싶다. 

 

 

책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 표지. 인터넷 서점 <예스 24>에서 가져옴

 

 

문태준 시인의 산문집을 읽고 있다.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이다. 가볍게 읽고 있다. 내용이 가볍다는 것이 아니다. 허드레라니. 말도 안 된다. 우선 두툼한 소설과 달리 얇아서 가볍다. 삽입된 삽화들이 차지하는 공간이 제법 있다. 내용에 적합한 내용의 삽화들 또한 눈에 쉽게 읽힌다. 삽화는 은근히 텃세를 부리는 종이 위 글자들의 위엄을 알맞게 조절한다. 가벼운 것은 그냥 가벼운 것이 아니다. 늘 내 몸과 정신 가까이에 두고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는 그의 대표 시선 <가재미>가 있다. 시집을 구매한 이후 줄곧 나와 함께 하는 시들의 글쓴이가 쓴 글인데 어찌 산문집이라고 그냥 가벼우랴. 그의 산문도 꼭 읽어야 할 필독서이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판단으로 일터 도서관에서 대여해 왔다. 사실 이 책은 내가 주문 요청을 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산문집이다. 자유를 전제로 배태된 문장 모음이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일정한 규칙에 제 몸을 불사르지 않는다. 산문은 율격을 거부한다. 떠나왔던지, 내빼왔던지, 거부당했던지 등 어떠한 이유에도 상관없이 제멋대로 막춤까지 불사할 수 있는 펑퍼짐의 글이다.

 

혼선 혹은 혼란

 

 

문태준 산문집은 일상에서 보고 만나고 듣는 것들에 읽고 생각하는 것을 연계시켜 쓰신 소탈한 글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주머니를 만들어 관련 글들을 소중히 담아내셨다. 쉬는 시간 짬짬이 정신의 휴식을 위해 읽을 수 있는 크기의 짧은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각 글마다 시며 문장이며 글귀를 함께 담았다.

 

담긴 글들은 모두 제각각 철학이다. 철학, 철학, 철학, 철학이 겹겹이 쌓여 있다. 층층이 쌓인 철학들은 한 편의 글마다 오로지 하나의 철학이다. 그 철학들이 하나의 궤에 모여있으므로 철학책이기도 하다. 생활이 문학을 데려왔다. 문학은 작가가 추구하는 생의 지향이다. 작가가 갈구하는 삶의 집합체이다. 

 

 

쟁반같이 둥근 달로 가고 있는 달

 

시며 산문집이며 문태준의 문장은 삶의 현장에서 뽑아낸 것들이다. 작가 자신도 새 책을 펴낼 때마다 꼭 밝히는 글쓰기의 쟁점이다. 이웃집 노부부에서부터 둥근 질항아리가 그의 삶과 그의 인생철학에 보탠 내용들이다. 재빨리 포착하되 길게 사고했을 것이다. 인물들과 사물들과 풍경들이 쏟아내는 현실에서 그는 자기 철학을 고리고리 연결하여 글을 뽑아낸다. 섣달그믐날 어스름에 설날을 위해 뽑아내는 방앗간 흰 떡가래처럼 그의 철학은 일상 곳곳을  길쭉길쭉 쓰다듬어 뽑아낸다. 그의 글에는 따뜻한 김이 서려 있고 백설의 순수가 짙게 고여있다. 그의 글을 읽으면 곧 나의 어제와 나의 오늘과 나의 내일이 만져진다. 

 

'머츰하다.' 문태준 시인의 글을 읽으면 내 안에 숨어있는 내 생의 어휘들이 살아난다. '머츰하다'는 그의 시집 '가재미'를 읽던 중 만난 낱말이다. 활발하게 진행되는 어떤 일들이 잠시 걸음을 멈춘 상태를 말한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여름 장마철의 찐득비가 잠시 숨 고르기를 하는지 멈춰 있을 때와 같은 것을 표한다. 한겨울, 며칠 연이어 내리던 폭설이 한파가 계속되리라는 기상 예보에도 불구하고 잠시 기운을 뺀 상태를 뜻한다. 백설의 포효가 해님에게 제 자리를 잠깐 내놓은 것을 말한다. 

 

   

머츰하다. 나의 어머니가 자주 쓰시던 낱말이다. 내리쏟는 태양의 힘이 너무 강해서 어린 마음에 우리 엄마 살갗이 타겠다 싶어 눈물 훔치던 날이 생각난다. 장마도 주기를 지닌 생명이다. 장마의 특성이 있다. 느닷없이 쏟아지던 소나기가 그치기도 하고 애벌레가 되기 전 길고 긴 겨울잠을 자듯 진득하면서도 지루하게 내리던 질척비가 있다. 내 눈물의 힘이었을까. 내 어미 새것 내가고 난 후 용케 소나기가 쏟아졌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우리 엄마가 맞은 쫄딱비가 얼마나 고맙던지.

 

 

나는 그가 내게 선사하는 낱말들과 구절들과 문장들을 만나면서 마침내 인간이 된다.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내 가련한 어미의 소중한 막내딸로 다시 태어난다. 내 안쓰러운 아비의 곧 피어날 꿈이 된다. 

 

가을가을한~

 

두 권을 책을 두고 며칠 씨름하고 있다. 문태준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번갈아 보고 있다. 근래 책 읽기에 심취한 듯 생활하는 내가 참 예쁘다. 꽃단장을 하고 나가면 스물 청춘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다. 책 읽기를 갈망하던 꽃청춘의 시절로 내가 되돌아간 듯싶다. 몸도 마음도 참 신선해진 기분이다. 고마운 책들. 고마운 작가들. 고마우신 문태준과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고마운 내 어머니와 나의 아버지. 

 

나도 첫 문장을 기다리는 시인이었으면 참 좋겠다. 소설가라면 참 좋겠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꼭 글을 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무명작가라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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