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봄이다.
그제와 어제 풍만한 양을 섭취한 저녁 식사로 몸이 무거워졌다. 그제, 돼지 목살구이 500그램 정도의 양을 먹었다. 으드득으드득 씹어먹었더니 양쪽 이빨이 급 피로를 호소하고 잇몸은 지쳐 나자빠질 것 같다고 아우성이다. 턱에도 돌 몇을 매단 것처럼 움직임이 서툴어졌다. 아랫 입술도 부풀어 올랐다.
어젯밤에는 참돔은 아닌 돔(무슨 돔이라 했는데 잊었다. 붉은색이 아니므로 참돔이 아니랬다.) 한 마리를 쪘는데 세 사람 중 2분의 1 이상이 내 입 속으로 들어갔다. 한 사람은 대형 회사 식당에 일을 하는 이어서 음식에 질렸다며 음식 섭취를 꺼려했고 또 한 사람은 평소에도 소식이다.
듣고 있는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 열심히 실내운동을 했다. 유튜브를 통해 새로 익힌 운동이 제법 힘들었다. 이름하여 중년 뱃살 제거 운동. 할만했다. 이틀 동안 저녁 식사로 섭취한 음식물 양에 비하면 몸 무거운 정도가 생각보다 약한 편이다. 물론 출퇴근길의 걷는 길이를 늘였다. 이른 봄 저녁 시간, 한 그릇 가득 고봉으로 밥을 먹고 늘어져 자려 하면서 해대던 어릴 적 우리 집 꼬마 일꾼의 하품처럼 길게 늘어뜨린 길. 오늘은 아파트 뒤쪽 미니 공원을 한 바퀴 돌기도 추가하여 걸었다. 그래봤자 일터까지 삼십 분을 조금 넘은 정도였다. 아침저녁으로 적어도 한 시간씩은 걸어야 한다. 내가 먹어 재끼는 음식의 양을 생각하면 말이다.
일터에 오니 출입구에 책자가 몇 박스 쌓여 있다. 일곱 시 이전에 출발한 출근길이었기에 업무 시작 전 아침 일기 초안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꿈이 와르르 무너졌다. 각 실에 필요량을 추측하여 분리하고 배달까지 해야 했다. 요즈음은 옛 같지 않다. 철저하게 자기 할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 눈웃음 머금고서 도움을 청하면 어느 누가 도움을 주지 않겠느냐마는 내 성격이 또 그렇다. 내가 하고 만다. 늙으니 혹 허리 삐걱할까 무섭지만 끌차가 있어서 할만했다. 너끈히 해낼 수 있었다.
나, 늘 소망하는 것이 육신을 제대로 부려야 하는 육체노동이지 않은가. 내 몸뚱이보다 큰 끌차를 끌고 와서 책자를 세고 분리하고 나누어 곳곳에 배달하고 나니 업무 시작 시각에 거의 가까워져 있다. 박스 펼치기와 손 씻기, 쪽지로 책 배달에 관해 안내하기까지 하고 나니 내 소중한 아침 시간이 홀라당 날아가 버렸다. 아깝지만 어떡하랴. 오늘 일기를 이 내용으로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마스크를 벗고 선글라스를 낀 흔적이 얼굴 벽에 남지 않았나를 살피는 것도 해야 한다. 읽고 있는 책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 차례 한 글씩 꼭 아침 시간에 읽자고 다짐했던 것을 어제도, 오늘도 지키지 못했다. 짬짬이 시간을 만들어서 오늘은 꼭 두 챕터는 읽고 퇴근하려 한다. 올 들어 가장 내 영혼을 뒤흔드는 문장들이다. 현재를 정확히 집어서 드러낸다. 한 문장 한 문장 참 단아하다. 단 한 틈새에도 거짓이 파고들 수 없는 꽉 찬 문장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참 행복하다. 그리고 부럽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을 전생에 얼마나 큰 덕을 쌓으신 것일까.
내 생은 지금 생에도 덕을 쌓지 못하고 있으니 어느 생에 도착해야 이런 유의 멋진 문장을 좔좔좔좔 표현해 낼 수 있을까. 욕심에는 이 책도 꼭 베껴 써 보고 싶다. 함께 읽고 있는 윤대녕의 단편 '은어낚시통신'도 베끼겠다는 다짐만 다졌을 뿐 단 한 줄도 써내지를 못했는데 이를 어찌한다냐.
나는 욕심만 너무 많다. 이리저리, 벌린 일들이 많을 뿐 쓸어 담을 결과가 없어 슬프다. 1년권을 끓어서 이것저것,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는데 그것도 어서어서 들어야 할 강의들이 많다. 그림도 그려 만족감과 뿌듯함을 얻어야 한다. 시를 외워 시를 못 쓰는 이의 비참함도 달래야 한다. 운동을 해야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살 수 있다. 달고 사는 역류성 식도염을 달랠 수 있다. 내 아이를 위해 파김치도 담아야 한다. 아, 올해는, 올봄에는, 올 오월까지는 베란다의 화초들도 어서 분갈이는 해줘야 한다. 하다 못해 며칠 전 굳게 맹세한, 삼십 년을 넘게 내 곁을 지키는 양란, '신비디움'과 대형 율마 일곱 분은 꼭 분갈이를 해야 한다. 그들은 어쩌면 죽음으로 내게 대항할 수도 있다.
일터 업무 시간이다. 아직 오전 새참 이전이다. 부리나케 아침 일기를 썼다. 내 일터 업무가 이렇게 사적인 일기를 쓸 수 있는 시간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래도 평생, 하고 살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창밖으로 봄볕이 제법 무르익어 여러 액자 속에 담겨 있다. 옆 방 젊은이는 일이 주일 전부터 반 팔이었다. 나는 여전히 초봄 내복용 바지를 입은 채 치마를 입고 있고, 여전히 늦겨울용 머플러를 둘둘 둘러매고 있다. 아침 녘을 걸으면서 걸쳤던 간절기용 코트를 벗어 들었다. 서서히 진짜 봄옷을 걸쳐 입을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기대된다. 몸뚱이에서 산 세포들의 활동이 줄어들면서 좋아하는 계절에서 겨울을 탈락시켰다. 가벼운 속옷에 한 가닥 원피스만 입게 되는 여름이 좋아졌다. 어느 날에는 문득 바느질이 없는, 달랑 천뿐인 천을 내 하얀 몸에 감싼 것을 의상으로 처리하여 사는, 그런 생활을 하고 싶다는~. 허리를 칭칭 동여맨 채 말이다.
오늘은 제법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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