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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어쨌든 공부

페이메이르 그리고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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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페이메이르 그리고 고흐

 

Meisje met de parel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초상화,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1665년 경, 네덜란드 - 나무위키에서 가져옴

 

유튜브 <최강 1교시>에서 전원경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충분히 늦은 아침을 시작했다는 거다.

 

엊그제 시청했던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알고리즘을 작동시켰을까. 아니다. 다른 유튜브에서 여러 도시를 강의한 이 전원경 교수의 강의에 그만 뿅 가버린 것이 이유이리라. 그녀는 어떤 댓글처럼 강의 내용에 참 어울리는 모습이면서 목소리였다. 상대를 끌어들이는 강의였다.

 

오늘 그녀의 강의는 고흐. 그리고 페이메이르. 고흐는 고흐인데 페이메이르가 누구람? 그래, 내가 본 영화 속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작가(화가)이다. 나는 가끔 그의 그림들을 보면서 고흐와 엮어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왜 고흐만 최고일까, 왜 그 아름다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저 혼자만 유명세를 탔는가. 왜, 자신을 탄생시킨 화가에게 인색한 세상을 나무라지 않는가?"

 

페이메이르는 무엇 때문에 고흐처럼 대접을 못 받는 것일까. 물론 고흐, 대단한 화가이다. 그의 독창적인 표현 기법이며 그림 속 담겨진 스토리며 그의 인생 스토리를 누가 만들어낼 수 있으랴만.

 

오늘 이곳에서는 전원경 교수님의 강의 '페이메이르와 고흐' 중 '페이메이르'에게 집중한다.

 

페이메이르는 누구? 고흐와 함께 들먹여지는, 네덜란드 화가. 그는 바로크 시대를 살았다. 17세기 후반 (1632년 10월 ~ 1675년). 그런데 이뿐이다. 페이메이르에 대한 정보는 이 정도. 왜 그럴까. 그는 사망 후 약 200년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재발견'된 화가. 그는 어떻게 재발견되고 어떻게 유명세를 타게 되었는가.

 

잠깐, 바로크 시대라니. 어떤 특징을 지닌 시기인가. 바로크는 르네상스를 밟고 일어선 사조. 물론 여러 관점에서 이 시기의 특징을 조명할 수 있다. 우선 마르틴 루터와 요한 칼빈, 킹 헨리 8세 등 종교 개혁에서 바로크 시대를 말할 수 있겠다. 가톨릭의 권위에 도전하여 구교와의 분리를 선언한 신교 종파의 형성. 그들은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게 한 이유도 생산했다. 과학 혁명도 들 수 있겠다. 17세기에 시작된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의 형성이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한네스 케플러 등 중세에 도전하는 새 시대의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변화된 세계는 곧 계급 제도의 변화로 이어졌다. 부유한 상인 계급, 즉 부르주아의 등장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몇 단계 향상된 생활은 곧 예술과 문화의 다양화를 살게 하였다. 곧 바로크 시대, 현대적이고 다양하고 다중적인 방향으로 변화한 예술을 잉태시켰다. 르네상스를 업그레이드하고 더 화려하고 감정적이며, 현실과 신화를 결합한, 복합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이는 곧 새로운 시대를 탄생시켰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주로 활동했던 시기이다.

 

페이메이르는 탄생지와 생년월일, 몇 가지 짧은 단서 외에는 별로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화가가. 1675년 사망한 후 200년 넘게 망각 속에 있던 화가. 작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이후 드디어 페르메이르의 흔적을 찾아 화가의 삶을 재구성하게 되었다. 차츰 전 세계적인 인기도 누리게 되었다. 그의 삶과 작품이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아주 고요하고 내밀한 작품 세계 및 신비의 무덤 속에 안치되어 있던 그의 생애는 ‘델프트의 스핑크스’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그는 델프트에서 태어나 델프트에서 생을 마감했단다. 오직 델프트에서만 작품활동을 했단다. 아내가 있었고 11명의 자녀를 낳았단다. 자녀 몇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단다. 그는 참 고요한 삶을 살았나 보다.

 

페이메이르의 작품은 고작 37점이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델프트 시의 전경》이 대표적이다. 19세기 말에 '재발견'된 그의 미술은 〈진주 귀고리 소녀〉로 우리 시각을 파고드는 매혹 때문에 유명하다. 너, 소녀를 바라보는 내게 머무르는 소녀의 눈동자. 소녀의 얼굴은 자신을 바라보는 내게 뭔가 해 줄 이야기가 있는 듯 또롱또롱한 눈망울이 커다랗게 놓여있다. 실감이 난다. 백 점짜리 생명력이다.

 

전원경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본 영화 '진주 귀걸이의 소녀'를 통해서도 확실히 느꼈다. 페르메이르, 그의 그림은 내밀한 사연이 있을 듯싶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혹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야 할 이야기를 안고 있는 듯싶다. 그것이 곧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오늘날 재 조명받게 하는 힘일 것이다. 〈진주 귀고리 소녀〉에 대한 관심은 장편소설로 출간되게 했고 얼마 전 내가 다시 본, 콜린 퍼스와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영화화가 되었다.

 

영화는 대체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소설, 그림 속 주인공은 누구인지를 찾는 것이 주제이다. 실사에 의하면 아무런 단서도 없으며, 어떠한 추측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녀, “영원히 살아 있는 350년 전의 소녀”는 똘망똘망, 총기 가득한 눈망울로 관객을 직시한다.

"더 가까이, 내게 더 가까이 와 봐. 네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내 두 눈을 보고도 궁금하지 않아? 내게 물어, 내게 질문을 던지라고.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 눈이 네게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히 여겨줘, 너의 궁금한 것을 물어줘."

 

그녀는 커다란 귀고리를 또렷하게 잘생긴 두 귀에 하고 관객에게, 우리에게 반짝반짝한 시선을 보내온다. 시선은 금빛, 은빛 그리고 뭔가 이야기를 담은 애절한 눈망울을 하고서 내 눈빛을 붙잡는다. 그녀 앞에 서면 이미 흐릿해진 것이 오래된 내 눈빛이 민망하다. 대체 그녀,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실제 이름은 무엇일까. 책 '진주 귀걸이를 한 그녀의 고향은 어디일까. 수많은 질문을 밟고 오늘도 진주 귀걸이를 한 그 소녀는 수수께끼이다.

 

또 다른 그의 대표작으로 들먹여지는 작품 "델프트 시의 전경"도 작품 제작 시기는 비슷하다. 이 작품에서 감상 관점은 단연코 '색조(색조(色調))이다. 맑고, 부드러운 빛과 색깔의 조화가 빚어내는 고요와 적막함, 조용한 정취와 정밀감(靜密感)이 넘쳐 보이는 작품이다. 딱,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살았을 법한 고요의 도시이다. 내가 살고 싶어하는 그곳, 어느 소도시 혹은 소도시의 변두리가 상상되는 그런 분위기의 그림이다. 어떤 이는 이 그림은 마치 개인날 북구의 새벽공기, 대기(大氣)를 생각나게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유 따르는 하녀", "물 주전자를 든 여인"은 한 인물이지 않을까. 가끔 진득하게 들여다보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역시 한 핏줄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요하네스 페이메이르의 작품 속 여자들은 그 눈빛이 똑같다. 어느 한 구설 잔뜩 깊은 비밀을 싸안고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될, 어쩌면 간절하게 이야기를 퍼붓고 싶은 입술과 함께 그들의 삶은 참 애잔해 보인다. 사랑 한 구석 그만 잘린 듯싶어지는 슬픔이 그녀들의 낯빛에 담겨 있다. 아마 내가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너무나 열정적으로 본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페르메이르의 흔적을 더듬다”라는 내용의 책에서 전원경 교수가 말한다. 세계를 뒤흔들던, 황금기를 구가했던 네덜란드. 그러나 그 시대 화가는 후원자를 얼마나 잘 고르냐에 따라 자기 그림의 가치가 매겨졌다. 상당수 화가는 밑바닥 생활을 하던 시기이다. 오직, 세기를 위해, 군주를 위해, 시대를 위해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자기 생을 연명해야만 했던, 아직 예술가들의 불행기. 역동적인 사회로의 대변신. 나태나 사치, 허세를 용납하지 않는, 중세를 탈피하여 근대 시민사회로 격렬하게 나아가던 시기.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17세기, 그 시대 인간 군상들의 삶을 고요하게 펼쳐낸다. 한편 당시 서민들이 안고 있던 비밀 출구를 온전히 갖추지 못한 스토리로 캔버스에 펼쳐낸다.

 

전원경 교수님은 말한다. 아마도 페르메이르는 자기 생의 근면함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평온한 일상을 구매하여 작품 속에 드러낸다. 새삼 우리 현실의 각 컷을 후회스럽게만 치부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현실 생활 속에 깃든 평화로운 일상을 수긍하게 한다. 때로 그리워하게도 한다. 새삼 캔버스에 드러내는 우리네 일상이 가끔 다행스럽기도 하고 어떤 경우 위대해 보이게도 한다. 페이메이르의 작품이 곧 우리 현실인데도 한편 침 꿀꺽 삼켜가면서 그리워하게도 한다. 순리대로 진행되는 우리의 생을 잔잔하게 쓰다듬어 준다. 순간순간이 아름답다고, 부디 탐욕일랑 버리고 편안하게 살아내자고 우리 마음을 두들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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