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천나게 먹어보고 싶다.
오늘 아침 일어나면서 느껴지는 입속 느낌이 매우 무거웠다. 며칠 전부터 그렇다. 무거움의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혀 위에 내려앉아 있는 어떤 기운이 검다. 그 무게도 짙어지고 이비인후를 가득 채운 냄새도 지저분하다.
한양에 사는 살림꾼 언니의 전화로 내 입 냄새와 입 안 무게에 관한 생각이 더욱 또렷해졌다. 낼모레가 정월 대보름이어서 신혼살림 중인 아들과 딸 부부를 위해 오곡밥을 할 연습을 했단다. 어미 먼저 맛있게 해 먹었노라고, 내일 열심히 다시 해서 아들 부부, 딸 부부를 불러 가져다 먹게 하겠다고, 너도 앞으로 그렇게 하라는 주문까지 한다.
오곡밥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생각나는 낱말이 이것이다. '허천나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들은 전혀 알지 못할 거다. 나 어릴 적에는 허천나게 먹어보는 것이 소망인 사람들이 많았다. 나야 입이 짧고(지금은 아니지만~) 그다지 먹을 것에 흥미나 취미가 많지 않았던 듯싶다. 있으면 있는 대로 먹고 없으면 없는 대로 멈췄을 뿐 뭔가 먹고 싶어서 환장했던 기억은 거의 없다. 물론 음식이 거창하고 화려하게 준비된 날은 잘 먹었다. 허천나다에 버금갈 정도로 먹기도 했을 거다.
한데 오늘 아침 새삼스럽게 느낀 입속 분위기며 언니의 오곡밥 준비 타령에 '허천나게' 무엇인가를 먹을 수 없는 나를 실감했다. 내멋대로 즉 입이 요구하는 대로 먹지를 못하는 나다. 역류성 식도염인지 뭔지 하는 관계로 우선 야식은 절대로 안 된다. 거의 취하지 않는다. 딱 저녁 식사로 끝이다. 물 이외 아무것도 밤참으로 섭취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해서는 안 된다.
밀가루 음식이 속을 깎으니 빵 종류의 음식을 내 마음이 부르는 대로 사 먹지를 못한다. 내가 음식을 섭취하는, 즐기는 한 방법으로 텔레비전에 어떤 음식이 나올 때, 영화에서 주인공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책 속 주인공이 음식을 취하고 있다는 문장을 읽을 때 나도 함께 먹는 것을 즐기는데 이 습관을 거의 버렸다.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맛있게 빵을 먹고 있을 때 바삐 사 와서 한두 조각 정도 입에 담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까지 씹었다가 삼키는 방식으로 빵 음식을 섭취하곤 한다. 어쩌다가, 어느 날, 별 탈이 없이 식도를 통과하고 소장과 대장을 통과하여 다음 날 또 취하면 바로 젬병이다. 해서는 아니 된다. 안 된다.
많은 양을 먹으면 또 탈이 난다. 한때, 멋모르고 마구마구 먹던 시절의 끝자락, 즉 역류성 식도염 기가 있다는 진단을 받고도 쉽게 지나치고는 한 끼 식사에서
집 앞에서 어디까지 걸어갔다가 왔더니 너무 배가 고파서 해놓은 오곡밥을 몽땅 먹어버렸다는 언니가 얼마나 부러운지. 내가 안쓰러워졌다.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다니. 돈을 지니고 있는데도 마음이 부르고 눈이 원하고 내 코의 매끄러운 후각 신경이 소원하는 맛있는 음식들을 먹어서는 안 된다니 이 얼마나 한탄스러울 일인가. 기억이 원하고 미각 신경이 간절히 바라는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없다니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음식 섭취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이라고 해도 될 만큼 나의 음식 섭취 방법은 가련하고 안타깝고 불쌍하다.
무슨 음식이든지 간에 내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내 입이 부르는 음식을 마음껏 먹어보고 싶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를 두들기면서 북을 치곤 했던 내 유년 시절의 음악 놀이를 좀 마음껏 해보고 싶다.
'허천나게'는 '엄청나게'의 남도 사투리이다. '매우', '많이', '급하게' 혹은 '허벌라게'나 '겁나게'와 의미가 비슷하다. 다만 '허벌라게'나 '겁나게'는 많다는 의미가 강하고, '허천나게'는 '급하게'라는 의미가 강하다 하겠다. 게걸스럽게, 바삐, 오직 먹는 것에만 매달려서 밥을 먹을 때에 흔히 쓰는 표현이다. 가까운 사이에서는 임의롭고 재미나게 상대방의 행동을 드러내는 표현인가 하면 그런 행위를 하는 상대가 미울 때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나는 내 행위를 바라보는 어떤 이가 부정적인 방향에서 나를 비웃는 의미로 이 낱말을 사용한대도 괜찮다. 허천나게 음식을 좀 먹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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